세월을 품은 거목, 그 아래서 마주한 마음의 고향

전갑남 2026. 5. 20.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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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행기 3] 알펜루트 비조다이라 역에서 마주한 전설과 고향의 금줄

지난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다녀온 3박 4일 일본 여행기. <기자말>

[전갑남 기자]

 험준한 산악 역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지명이 인상적인 비조다이라(美女平)역사. 긴 여정의 끝, 새로운 사연을 품고 나그네를 맞이한다.
ⓒ 전갑남
알펜루트의 긴 여정이 마침표를 찍는 곳, 비조다이라(美女平)역에 닿았다. 일본의 알프스라 불리는 알펜루트에서의 시간은 아기자기하면서도 계절을 뛰어넘는 장엄함을 선사하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흘러갔다. 여정의 마지막 열차를 타기 위해 도착한 이곳은 험준한 산악 역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묘한 지명을 품고 있어 시작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산악 역에 스민 이색적인 이름

역 앞에 서서 예사롭지 않은 풍채를 자랑하는 두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를 바라보던 아내가 혼잣말처럼 툭 던졌다.

"아름다운 여인과 얽힌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정말 그럴까?"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대비되는 미녀삼나무의 웅장한 자태. 알펜루트의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하는 나그네들이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전갑남
곁에 서 있던 동행한 친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 대화를 이정표 삼아 지명에 얽힌 내력을 찾아보니, 아내의 직감대로 그 이름만큼이나 애틋하고 서글픈 전설이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옛날 이 깊고 신성한 산에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공주가 살고 있었다. 공주는 어느 날 산 아래 마을의 한 젊은 남자와 운명 같은 사랑에 빠졌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거칠게 반대했다. 다시는 산을 내려가지 말라는 엄한 금기조차 사랑의 불꽃을 끄지는 못했다. 공주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밤 몰래 산을 내려가 청년과 깊은 사랑을 맺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크게 노하여 공주를 강제로 붙잡아 산으로 끌고 올라왔다.
 공주의 슬픈 전설과 지명의 유래가 또렷하게 새겨진 안내판. 한글 안내판과 QR코드가 있어 나그네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 전갑남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게 된 공주는 슬픔 속에서 매일 산 아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마침내 그 간절한 그리움이 고여 아름다운 삼나무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애처로운 생명 앞에 고개를 숙이며 '미녀삼나무(美女杉)'라 불렀고, 땅의 이름 또한 '미녀평(美女平)'이 되었다. 안내판 가운데 시구처럼 새겨진 짧은 노래가 바람을 타고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아름다운 미녀산의 숲이여, 흔들리는 빛과 바람 속에서 사랑의 마음은 지금도 살아 있다."

지명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니, 눈앞의 거대한 삼나무가 진정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거칠고 단단하게 뻗은 줄기는 모진 풍파와 반대를 견뎌낸 여인의 굳은 절개 같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는 여전히 산 아래 청년을 향해 간절히 손짓하는 공주의 실루엣처럼 애처롭게 겹쳐왔다. 아내와 친구도 전설의 무게를 느꼈는지 잠시 말을 잊은 채 묵묵히 거목을 올려다보았다.

빛과 바람 속에 고인 서늘한 삼나무 향

역 앞 플랫폼에 내려서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짙고 서늘한 삼나무 향이 은은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신선한 숨결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푸른 하늘을 지붕 삼아 우뚝 선 아름드리 삼나무 두 그루가 수백 년의 시간을 족히 품은 채 서 있었다. 굵은 몸통에는 깊은 연륜의 주름이 패어 있었고, 그 단단한 허리춤에는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는 두꺼운 새끼줄 금줄이 단단히 둘러져 있었다.
 수백 년 세월의 주름을 간직한 두 그루의 삼나무. 신성한 영역임을 알리는 두꺼운 금줄이 허리춤에 단단히 둘러져 있다.
ⓒ 전갑남
가지마다 산의 바람과 눈보라를 견뎌낸 흔적이 역력한 나무 아래로 시선을 낮추자 작은 석상이 눈에 들어왔다. 두 손을 모은 채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지장보살상, 그리고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화사한 빛깔의 꽃들과 작은 시전함. 크지 않은 돌상이지만 모진 산방의 추위를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온기와 묘한 경건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척박한 겨울과 폭설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산속 사람들에게 이 거목은 곧 산의 정령이자 삶의 버팀목이었으리라. 사람들은 풍년을 빌고 무사한 길을 기원하며 나무에 금줄을 치고, 돌상 앞에 꽃을 바치며 두 손 모아 절을 올렸을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기도가 있기 마련인가 봐요"

삼나무 몸통을 칭칭 감은 굵은 금줄과 그 아래 나지막이 자리한 지장보살상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예전 당산나무와 같은 존재가 일본에도 있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기도가 있기 마련인가 봐."
"그러게요.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국경을 넘어도 다 똑같은가..."
 비조다이라역의 상징, 미녀삼나무(美女杉) 아래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누군가 가져다 놓은 화사한 꽃들이 전설 속 공주의 그리움을 애처롭게 달래고 있는 듯싶다.
ⓒ 전갑남
아내의 대꾸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예전 고향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느티나무가 선명하게 겹쳐왔다. 정월 대보름이면 어른들이 굵은 금줄을 치고 정성껏 제를 올리던 모습, 자식 잘 되기를 바라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고여 있던 그 나무 둘레를 아이들은 뛰놀고, 어른들은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풍경. 나라와 풍습, 종교는 달라도 거대한 생명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삶의 평안을 비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하나인 모양이다. 삼나무의 금줄과 고향의 금줄은 같은 마음의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삼나무는 인간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흐름 속에 살아간다. 우리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이지만, 저 나무는 수많은 계절을 건너며 이 자리를 지키고, 공주의 눈물겨운 노래부터 나그네들의 기원까지 모든 기억을 품으며 자라왔을 것이다.

산바람이 스쳐 지나자 삼나무 가지 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여행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을 선사하며 "남은 여정 잘 지내고 가!" 인사를 하는 듯했다.

열차 시간이 가까워져 플랫폼으로 향하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인간의 기도와 시간을 품고 서 있던, 우리네 삶과 참 닮아 있는 거목. 그 나무는 찬란한 햇살 아래 빛나던 알펜루트의 설벽만큼이나 오래도록 여행자의 마음에 가만히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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