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배달 멈춘 라이더·외국인 유학생… 하나 된 오월 광주
세대와 국적 초월한 연대의 현장
폭염 속에서도 이어진 기억의 물결
"광주에 살면서도 민주묘지는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어요.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도심 한복판에서 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유모차를 끌고 나왔습니다."

18일 오전 광주 동구 옛 전남도청 앞 5·18민주광장. 제46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린 현장에서 만난 장민재 씨(37·광주 서구)는 두 딸의 손을 꼭 쥔 채 메인 무대를 바라봤다. 장 씨의 옆에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2살, 다섯 살배기 어린 딸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장 씨는 "국립5·18민주묘지가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모를 엄숙함과 심리적 거리감 때문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며 "오늘 이렇게 일상의 공간인 금남로 광장에서 행사가 열리니 한결 친숙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아직 역사를 가르치기도 어렵고 오늘 일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을 잘 안다"면서도 "하지만 우리가 아이가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태교를 하는 것처럼, 광주가 어떤 곳인지, 우리가 왜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 몸으로 먼저 느끼게 해주고 싶어 집을 나섰다"고 전했다.
다만 장 씨는 한낮 기온이 30도 안팎까지 치솟는 땡볕 더위를 가리키며 "유모차를 비할 만한 그늘막이나 휴식 공간이 부족해 아이들과 함께 오래 머물기에는 다소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유학생도 매료된 '축제이자 연대의 오월'이날 광장은 광주시민뿐만 아니라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한국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는 이탈리아 유학생 미젤 씨(24)는 광장 곳곳에 마련된 체험 부스를 돌며 감탄을 연발했다.
미젤 씨는 "국가폭력으로 인한 뼈아픈 역사를 단순히 슬픔에 가두지 않고, 전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축제로 승화시켜 기억하는 모습이 정말 신선하고 새로웠다"며 호평했다. 그는 "5·18이나 한국 현대사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는데, 오늘 민주광장을 직접 방문해 보니 한국 역사에 흐르는 민주주의 역동성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특히 미젤 씨는 이달 초부터 광주에서 진행된 오월 행사들을 경험하며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연대할 수 있도록 준비된 다양한 참여형 프로그램에 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역사적으로 수많은 시련을 극복해 낸 한국 국민들의 기쁨과 자부심이 현장에서 그대로 전해졌다"며 "비극적인 과거를 당당한 자부심으로 바꿔낸 광주 시민들을 보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 기념사에 멈춰 선 오토바이… "광주의 자부심"기념식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오전 11시께, 대형 LED 모니터를 통해 이재명 대통령의 기념사가 중계되자 광장 외곽 도로에 오토바이 한 대가 급히 멈춰 섰다.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장현수 씨(44)였다. 장 씨는 헬멧을 벗어 오토바이에 걸어둔 채,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마트폰 배달 앱에서 연신 알람이 울려댔지만, 장 씨는 자리를 지켰다. 점심 대목을 앞둔 바쁜 시간이었음에도 그에게는 배달 호출보다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오월의 메시지가 더 중요했다.
장 씨는 "광주에서 나고 자란 라이더로서 매년 오월은 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해지는 시기"라며 운을 뗐다. 그는 "과거에는 오월이 오면 슬프고 억울한 마음이 먼저 앞섰는데, 오늘 도심 광장에서 당당하게 거행되는 기념식과 대통령의 기념사를 들으니 비로소 광주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이 솟구친다"고 말했다.
이어 장 씨는 "우리 같은 노동자들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일상의 민주주의도 결국 46년 전 이곳에서 피 흘려 싸운 오월 영령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느냐"며 "오늘만큼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더라도 그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국가가 이 역사를 어떻게 예우하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싶었다"고 말한 뒤 다시 헬멧을 고쳐 썼다.
호남취재본부 민현기 기자 hyunk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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