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7분간 기립박수 터졌다…칸 뒤집은 나홍진표 ‘논두렁 SF’

나원정 2026. 5. 18.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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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영화 '호프' 칸 첫 공개
'곡성' 이후 10년만에 복귀
"본 적 없는 나홍진표 하이브리드 영화"
17일(현지시간) 영화 '호프'가 프랑스 칸에서 개최중인 제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됐다. 이 영화로 10년 만에 연출 복귀한 나홍진 감독(가운데)이 주연 황정민, 마이클 패스벤더 등 배우들과 함께 경쟁 부문 상영이 열리는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에 들어서고 있다. AFP=연합

나홍진 감독의 10년 만의 신작 ‘호프’가 단숨에 칸영화제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호프’는 17일(현지시간), 제79회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총 22편의 진출작 중 12번째로 베일을 벗었다. 이날 밤 9시 30분 늦은 시각, 160분이란 긴 상영시간임에도 뤼미에르 대극장의 2300여석을 끝까지 지킨 관객들은 총 7분간의 기립박수로 감독의 과감한 실험에 호응했다. 외계인을 연기한 할리우드 배우 마이클 패스밴더, 알리샤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등도 이날 나 감독, 주연 황정민, 조인성 등과 함께 참석했다. 상영 후 나홍진 감독은 객석을 향해 “이렇게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거듭 말했다.


칸 경쟁에 외계인 SF, 놀랍다


17일(현지 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 레드카펫에서 영화 '호프'로 초청받은 스웨덴 배우 알리샤 비칸데르(왼쪽부터), 정호연, 테일러 러셀, 나홍진 감독, 마이클 패스벤더, 황정민, 조인성 등이 현지 관객의 환호를 받고 있다. '호프'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 22편 중 12번째로 공개됐다. AFP=연합
작가주의 감독의 드라마 영화가 주를 이루는 칸 경쟁부문에서 ‘호프’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SF 액션 스릴러란 점부터 파격이었다. 이런 대중적 장르 영화가 칸 경쟁부문에 호명된 것 자체가 “놀라운 일”(데드라인)이란 반응이다.

1980년대 비무장지대(DMZ) 인근의 외딴 마을 호포항. 출장소장 범석(황정민)은 마을에서 키우던 소와 주민들이 줄줄이 죽어나가자 총을 들고 침입자를 추격한다.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 무리도 가세한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숨 가쁜 추격전이 지속된다.

왜 죽는지, 무엇에 죽는지도 모른 채로 던져지고 짓이겨진 시체가 두메산골, 논두렁을 가리지 않고 쌓일 무렵 괴력의 생명체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흡사 ‘진격의 거인’에 ‘아바타’ 속 나비 족을 빼닮은 그들은 알고 보면 고향을 잃고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다. 영화엔 이러한 사연보단 질주하는 액션, 유혈낭자한 살육 그 자체의 스펙터클이 강조된다.


"나홍진 감독, 농촌 SF 발명했다"


영화 '호프'의 스틸 컷. 비상 전화로 통화하고 있는 마을 청년 성기(조인성). 그를 비롯한 마을 청년들은 동네 논두렁에 기이하게 죽어있는 황소를 통해 외계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호프’는 나홍진 영화로도 이례적이다. 그는 데뷔작 ‘추격자’가 2008년 미드나잇 스크리닝(심야상영)에 상영되며 독보적 스타일을 보여줬다. 연출작 4편을 모두 초청한 칸영화제에 따르면 “숨 막히는 긴장감, 적나라한 폭력 묘사, 혼돈을 생생하게 담는 역동적 연출 기법”이 그의 특징이다. 이날 칸영화제측은 공식 홈페이지에 역대 나홍진 감독의 칸 초청작을 돌아보며 “ ‘황해’(2011, 주목할만한 시선), ‘곡성’(2016, 비경쟁)으로 컬트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고 소개했다.

‘호프’는 “불가해한 공포와 편집증에 휩싸인 공동체, 미숙한 경찰들을 보여준다”(스크린데일리)는 점에서 일면 ‘곡성’과 닮았지만 장르적으론 훨씬 확장된 변주를 보인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일찍이 본 적 없는 나홍진표 하이브리드 영화”라고 명명했다. 이날 영화를 본 부산국제영화제 정한석 집행위원장은 이를 ‘발명’에 빗댔다. “봉준호 감독이 농촌 스릴러(‘살인의 추억’)를 발명했다면, 나홍진 감독은 농촌 SF를 발명했다. 장르적 포부와 재미, 기술력, 그리고 나홍진식 블랙 코미디가 돋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임현식 설사 틀어막는 연기에 폭소


영화 '호프' 해외 포스터. 장총을 메고 말을 달리는 모습은 현대 배경의 한국 영화에선 보기 드물다. 이를 비롯해 '호프'는 외딴 항구마을에 불시착한 외계인을 소재로 나홍진 감독만의 낯선 상상을 펼쳐낸 작품으로 알려졌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호프’는 나 감독의 전작들만큼 폭력수위가 높지만,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움이 극의 분위기를 예전보다 가볍게 만든다. 범석은 주민들을 살리려다 외려 죽음에 몰아넣고, 정호연이 연기한 경찰 성애의 정의감은 때때로 과장되게 그려진다. 가장 큰 웃음을 터뜨린 건 배우 임현식의 감초 연기다. 그가 분한 마을 노인이 숲에서 용변을 보다가 외계인을 만나, 설사를 막으려고 동원한 방법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장면에서다. “턱시도와 오트쿠튀르 의상을 차려입은 관객들이 ‘영화의 성전’에서 이 장면에 폭소를 터뜨렸다”고 버라이어티는 전했다.

"외계인 진짜 적일까? 이민자 연상"


반면 외계인 CG(컴퓨터그래픽) 완성도는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미국 매체 ‘인디와이어’는 “‘호프’의 첫 한시간은 황홀하나 외계인 등장부터 몰입이 깨진다”고 비판했다. 맨얼굴이 아예 안 나오는 모션캡처 캐릭터로 100% 외계어 대사를 연기한 패스밴더, 비칸데르 등도 후속작이 나와야 더 활약할 걸로 보인다.
17일(현지 시간) 프랑스 칸 뤼미에르 대극장에 나란히 선 '호프' 팀. 처음 한국 영화에 출연한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는 신작 촬영중 짧은 일정으로 '호프' 팀에 합류했다. 그는 이날 프리미어 상영 등 공식 일정을 마치고 이튿날 먼저 칸을 떠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로이터=연합

이를 비롯해 인간 대 외계인의 살육 구도도 뚜렷한 명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외려 이런 여백에 해석이 잇따른다. 영국 매체 ‘스크린데일리’는 “누가 진정한 괴물인지, 누구를 옹호해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고, 버라이어티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CG로 분장한 채 무표정한 외계인 일족을 연기한 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아시아 배우들을 소외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을 교묘하게 뒤집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풀이했다. 데드라인은 “외계인들은 자신들을 추적하는 인간들보다 훨씬 더 문명화된 모습을 보인다”며 “그런데 인간들은 과연 그들이 진짜 적일까, 하는 의문조차 품지 않는다. 이는 이민자를 추방해야 할 침입자로 여기는 현대사회에 대한 함의를 더한다”고 말했다.
칸영화제측은 '호프'의 첫 공식 상영이 있는 17일(현지 시간) 오전, 공식 홈페이지에 역대 칸영화제에 초청된 나홍진 감독의 모든 연출작을 집중 조명하는 기사를 실었다. 사진 칸영화제 홈페이지 캡처
화제작이 없었던 올해 칸영화제에서 ‘호프’는 이튿날 상영까지 대부분 매진되며 달아오른 관심을 입증했다. ‘호프’는 ‘기생충’(2019)을 북미 배급한 네온이 북미·영국·호주 배급을, ‘헤어질 결심’(2022)을 북미 등에 배급한 무비가 남미·이탈리아·스페인·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터키 배급권을 가져갔다. 네온은 ‘기생충’ 외에도 ‘티탄’ ‘슬픔의 삼각형’ ‘추락의 해부’ ‘아노라’ ‘그저 사고였을뿐’ 등 2019년부터 6년 연속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의 북미 배급권을 선점해왔다. 올해 칸영화제 수상 결과는 오는 23일 폐막식에서 공개된다.

프랑스 칸=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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