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달라" 외치니... 수많은 목포시민들이 같은 길을 걸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6. 5. 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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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광주를 응원한 목포 5·18

[김종성 기자]

 1980년 5월 목포역광장에 모인 목포시민들
ⓒ 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5·18은 1980년 그해에 대한민국 어디로든 번질 수 있었다. 1979년 10·26 사태로 인한 정치적 긴장과 비상계엄에다가 신군부의 언론통제와 광주의 물리적 고립이 더해져 전국 곳곳으로 당장 확산하지 못했을 뿐이다. 5·18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이다가 1987년 6월항쟁으로 결국 폭발한 것은 5·18에 내재된 휘발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때 광주 참상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항쟁에 동참했을 것이라는 점은 당시의 목포 상황이 웅변한다. 광주 소식이 전해진 광주 서남쪽 목포에서도 광주와 비슷한 양상이 전개됐다. 광주에서처럼 대규모 유혈 참상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광주시민들과 연대하는 '목포 5·18'이 이곳에서 전개됐다.

광주민주화운동 9주년 특집인 1989년 2월 28일 자 <광주일보>는 목포 5·18이 1980년 5월 21일 개시됐음을 알려준다. 광주에서 시민군이 등장하고 이 부대가 전남도청을 접수한 날에 목포에서도 응원 시위가 일어났다. 21일 오후 2시경의 목포 상황에 관한 이 신문의 설명이다.

"광주로부터 빠져나온 시위대 2백여 명이 택시 1대와 고속버스 4대에 나눠 타고 나주·함평·무안을 거쳐 목포에 도착했다. 이들은 광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차량 시위를 벌이며 광주시민의 피해 상황과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 방송을 벌였다. '계엄령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광주시민들에 대한 응원 시위가 상황에 따라 전국 곳곳으로 퍼질 수도 있었다는 점은 위 <광주일보>의 또 다른 5·18 특집인 1989년 3월 13일 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계엄군의 포위를 뚫고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 일부는 광주 북쪽인 장성을 거쳐 전북과 서울 방면까지 진출하는 시도를 벌였다.

"21일 오전, 광주 시내에만 국한돼 고립적으로 저항하던 민중들의 움직임은 마침내 전남 도내 각 지방으로 확산돼 나갔다. 이날 오전, 처음에는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전주·서울 방면의 진출을 시도했던 시위대들은 광주-장성 사이의 당시 사남터널(현 호남터널) 부근에 대기 중이던 계엄군에 의해 강력한 저지를 받게 되자 그쪽 방향을 포기하고 주로 전남 도내 각 시군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21일 낮 영암·강진·해남 지방에도 차량을 이용한 시위대들이 광주 쪽에서 진입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위기에 맞서겠다는 목포시민들의 충정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은 목포시민들 중에는 광주를 돕겠다며 길을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이 시민들은 참상을 듣자마자 일말의 고민도 없이 광주행 버스에 올라탔다. 1989년 3월 17일 자 <광주일보>의 설명이다.

"손에 각목을 든 시민군들은 광주로 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광주시민들을 도와달라고 외쳐댔고, 목포시민들은 이에 호응, 버스에 올라탔다."

26세의 목포 청년인 김호성이 합류한 이 일행은 그날 오후 광주로 가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제지를 당했다. 전기 기술자였던 그는 이때 부상을 입고 붙들린 뒤 가까스로 살아났다.

수많은 목포시민들이 김호성과 같은 길을 걸었다. 광주 소식이 전해진 다음 날인 5월 22일 아침에는 이곳 시민들이 버스 11대를 이용해 광주로 출발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 맞서겠다는 목포시민들의 충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목포시민들 중에는 총기를 확보해 현지에서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다. 목포시민들이 조직화되기 전인 5월 21일 오후 상황에 관해 <역사학연구> 2025년 제100집에 실린 진지연 목포5·18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사료를 통해 본 목포 5·18민주화운동의 항쟁 양상과 특징'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에서 총기를 탈취하였으며, 여러 곳의 파출소를 방화하였다. (중략) 목포역 광장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운집했고, 차량을 이용해 시내를 돌며 밤을 새워 시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시민들이 확보한 무기의 양은 상당했다. 위 논문은 "5월 22일 07시부터 09시 30분 사이에 연동·남교·죽교 파출소에서 총기 267정을 피탈당했다"고 기술한다. 이것만 봐도, 광주 5·18 못지않게 목포 5·18도 확산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민들이 총을 집어 드는 이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자발적 결사체다. 대표적인 것은 재야인사 안철이 주도한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다. 22일 광주에서 조직된 5·18수습대책위원회와 비슷한 그룹이 같은 날 목포에서도 출현했다. 광주의 수습대책위가 그랬던 것처럼, 목포역 역사 2층에 본부를 둔 시민투쟁위도 총기 회수와 질서유지에 나서고 시민들의 입장을 정부 쪽에 전달했다.

목포 경찰은 21일 오후부터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경찰이 업무에 복귀한 것은 23일 아침이다. 이처럼 경찰이 제 역할을 하기 힘들었으므로 시민투쟁위의 역할은 한층 긴요했다.

목포역 광장에서 대규모 궐기대회

이런 상황에서 23일부터 목포역 광장에서 대규모 궐기대회가 거행됐다. 시민투쟁위가 이날 12시 30분경 개최한 궐기대회에는 약 4만 명이 참가했다. '우리의 겨레와 세계 자유민에게 보내는 목포시민의 결의문'이 낭독됐고, '김대중 석방', '계엄해제' 등의 플래카드가 나부꼈다. 비상계엄하에서도 이처럼 많은 시민들이 참가했다는 것은 신군부에 대한 분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궐기대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밤중까지 성토대회를 이어갔고, 저녁 8시 이후에는 횃불 행진을 벌였다. 광주가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치로 긴장 상태를 보이는 동안에, 목포에서는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를 장악한 가운데 민주화 요구가 울려퍼졌던 것이다. 목포역 광장은 28일까지 계속해서 대회 장소로 활용됐고, 횃불행진 역시 밤마다 열렸다.

5월 24일부터는 10대들의 시위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날 목포 시내 13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목포역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벌였다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일요일인 5월 25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으로 나섰다. 11시 대예배가 끝난 직후인 12시 45분부터 목포 시내 모든 교회가 목포역 광장에 모여 비상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여기서는 '광주시민 혁명에 대한 목포 지역교회의 신앙고백적 선언문'이 발표됐다.

이런 가운데 목포 지방정부도 편의를 제공했다. 관이 보유한 쌀을 무제한 방출하고, 시민들과의 대화에 나서고, 객지인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교통 편의를 제공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공권력이 여기서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 5·18을 응원하며 21일 개시된 목포 5·18은 광주 5·18이 처참하게 짓밟힌 다음 날인 5월 28일에 종료됐다. 이날 시위대 일부가 군부대로 연행되면서 목포 5·18은 막을 내렸다.

5월 21일에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전남을 벗어나 전국 곳곳으로 퍼졌다면, 신군부의 언론 통제와 광주 포위에 관계없이 '광주 5·18'은 '한국 5·18'로 확대될 수 있었다. 그런 확산이 좌절돼 목포 같은 일부 지역에서만 응원 시위가 일어났다.

목포 5·18은 광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광주로 달려가거나 자기 고장에서 계엄군에 저항했을 것임을 보여준다. 광주 5·18은 광주 민주주의만 억압하는 게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목포시민들이 보인 반응은 한국민 전체의 잠재적 반응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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