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피가 사방으로" 미공개 광주 인터뷰, 그를 찾아 미네소타로 떠났습니다

소중한 2026. 5. 18.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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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원덕기: 파일럿 1부] 힌츠페터 영상 속 미국인 팀 원버그, 광주와 닮은 2026년 그의 고향

5·18민주화운동 46주년 및 위르겐 힌츠페터 10주기를 맞아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합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한국 이름 원덕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펀딩 바로가기 https://omn.kr/2i36q <편집자말>

[소중한, 전선정, 김화빈, 이진민, 유지영 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민주화운동 중인 1980년 5월 24일 팀 원버그를 인터뷰한 전남대병원 옥상. 2026. 03. 13.
ⓒ 소중한
Most of them ended up getting their heads split open. You could see them savagely beat the head and it was split, and blood was spurt out all over everywhere.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가 결국 찢어졌습니다. 계엄군이 잔혹하게 때려 머리가 찢어진 것이 보일 정도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습니다."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의 긴박한 인터뷰. 이 사람을 꼭 찾아야 했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고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우리는 5·18기념재단에 보관된 그의 테이프에서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인터뷰 영상을 발견했습니다.

선글라스를 쓴 채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미국인. 미네소타대학 출신의 팀 원버그(Tim Warnberg, 5·18 당시 25세), 한국 이름 원덕기. 비빔냉면을 좋아했던 평범한 청년은 46년 전 우연히 항쟁에 휘말렸고 망설임 없이 광주에 남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광주는 팀을 각성시켰습니다.

팀은 광주를 위해 움직였고 광주는 자연스레 그를 성장시켰습니다. '폭도'가 돼 버린 죽은 자들은 그 덕분에 '시민'의 이름을 되찾았고, 의사가 되려던 그는 광주 때문에 옳다고 여긴 길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 나갔습니다.
 알렉스 프레티(Alex Pretti, 간호사)가 ICE(미국 이민세관단속국) 요원들의 집중 사격으로 숨진 장소(미국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 한복판에서)에 그를 추모하는 꽃이 놓여 있다. 2026. 03. 02.
ⓒ 이희훈
2026년 팀의 고향 미네소타는 광주와 닮아 있습니다. 한 지역을 겨냥한 참혹한 국가폭력에 맞서 시민들은 서로를 지켰습니다. 광주의 주먹밥처럼 미네소타 시민들은 호루라기를 나누며 이웃의 안녕을 확인했습니다.

광주의 미네소탄(Minnesotan) 팀 원버그 그리고 미네소타의 광주사람 원덕기. 우리는 46년 전 인터뷰 영상을 품은 채 그를 찾으러 미네소타로 향했습니다. 미네소타뿐 아니라 지구 곳곳의 일상이 폭력과 전쟁으로 얼룩진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가 답을 줄 것만 같았습니다.

[#1 유일한 인터뷰]

인터뷰 영상 속 팀은 약 2분 30초 동안 광주의 참상을 설명합니다. 1978년부터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렀던 팀이었기에, 그는 5·18을 시작부터 오롯이 마주했고 힌츠페터의 카메라 앞에서 명확히 진술했습니다.

팀 원버그(평화봉사단원으로 광주에 머물다 5·18 경험)
"We came out to, to go home and we were on a city bus and suddenly the soldiers moved out into the street and turned all the buses back. So, we got out of the bus and we were trying to take small alleyways to get home. And the soldiers came in and surrounded all the people and any young man, just that anybody, any young man was just standing there. They started savagely beating their legs and their heads."
"우리는 집에 가려고 밖으로 나왔고 시내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거리로 진입했고 모든 버스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고 골목을 통해 집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군인들이 들이닥쳐 모든 사람들을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남자라면 누구든, 서 있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리와 머리를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두 손이 뒤로 묶인 광주 시민을 계엄군이 넘어뜨리고 있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5월 24일, 항쟁 기간 도중의 인터뷰인데도 팀은 매우 정확히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기준에서 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사실을, 그는 또박또박 증언했습니다.
팀 원버그
"This is general citizens. Everybody was out now. Everybody was angry, people had been hurt. And the martial law commander was lying to the people in Seoul and the people in Gwangju. Since then they have umm pretty much cleaned the whole city up, organized a clean up campaign, have a 'weapons turn-in' program so that everybody is relinquishing all the weapons."
"이들은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거리로 나와 있었고, 모두가 분노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다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엄사령관은 서울과 광주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이후 시민들은 도시 전반을 거의 정리했고 청소 캠페인을 벌였으며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도록 무기를 회수했습니다."

항쟁 한복판에 있던 인물의 현장 인터뷰 영상은 5·18 관련 기록물 중 이번에 공개된 이 영상이 유일합니다.
- 5·18 당시의 영상 인터뷰가 남아 있나요?

유경남 전 5·18기념재단 국제연구원 연구실장
"없습니다. 특히 외국인이 항쟁의 사실을 증언하고 기록하는 목적이 분명한 인터뷰는 아마 (5·18은 물론) 그 유사한 어떤 역사적 사건에서도 보기 힘든 인터뷰이고 기록인 것 같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과 같이 소위 국제 사회가 인정할 만한 기준이 있어요. (이 인터뷰 영상은) 그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 위르겐 힌츠페터(왼쪽 카메라를 든 인물)와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가운데 체크무늬 셔츠)가 있고, 그의 뒤편에 또다른 단원 폴 코트라이트와 데이비드 돌린저가 서 있다.
ⓒ 5·18기념재단 제공
이 인터뷰가 있었던 날 찍힌 사진 한 장(위)이 있습니다. 맨 왼쪽 카메라를 든 이가 위르겐 힌츠페터, 가운데 쪽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이가 팀 원버그입니다. 우리는 맨 오른쪽 인물에게서 당시 상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영암에서 근무했던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는 팀과 함께 5·18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데이비드 돌린저 (팀 원버그의 평화봉사단 동료)
"(위르겐 힌츠페터의 인터뷰 요청에) 우리는 팀을 앞으로 내세우며 그가 이번 일을 가장 가까이서 겪고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이곳이 팀의 도시인 만큼 그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데이비드는 광주를 "팀의 도시"였다고 강조하며 당시 인터뷰의 목적이 분명했다고 전했습니다.
데이비드 돌린저
"팀에게 광주 시민들은 같은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로버트 그라찬 (팀 원버그의 친구, 전남대 영문과 명예교수)
"팀의 목소리에서 광주 사람들을 향한 존경도 느껴집니다. 그가 (계엄군이 잠시 물러난 뒤) 사람들이 도시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할 때 말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피투성이가 된 사망자들의 시신이 침상과 바닥에 놓여 있다.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미국 평화봉사단을 연구해 온 서나래 한국교원대 학술연구교수는 그간 5·18을 목격한 다른 평화봉사단원들의 모습과 인터뷰 영상 속 팀의 모습이 사뭇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서나래 (한국교원대 학술연구교수, 미국 평화봉사단 연구)
"5·18을 겪은 이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트라우마를 가진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거나 몸을 떠는 등 굉장히 큰 신체적 반응을 보이기도 하죠. 그런데 이 영상을 보면 팀은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굉장히 담담하게 사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 외국에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2 목격자를 넘어]

팀의 인터뷰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그가 단순한 목격자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팀 원버그
"I was helping the injured off the street because I was American..."
"저는 거리에서 부상자 이송을 도왔습니다. 제가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은 제가 거리를 지나도록 해줬고..."
 5·18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19일, 들것에 실린 환자를 옮기는 미국 평화봉사단원 팀 원버그(체크무늬 셔츠)와 광주 시민들. 전일빌딩에 있던 나경택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가 건너편 당시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을 지나는 이들을 촬영했다.
ⓒ 나경택 제공
이 진술은 1980년 5월 19일 찍힌 위 사진과도 일치합니다. 가운데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채 들것을 든 이가 바로 팀입니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지금도 셔터를 누르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합니다.
나경택 (5·18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 팀 원버그 촬영)
"전일빌딩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들것에 (환자를) 싣고 나타난 거예요. 실린 사람을 보니까 얼마나 맞았는지 눈알이 빠질 것 같았어요.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하고 외국인하고 또 광주 시민들이 함께 들것을 들고 가기에 사진을 찍었던 겁니다."

이 사진은 2019년 공개된 이른바 '보안사 사진첩'에도 등장합니다. 나 기자가 찍었던 사진을 당시 보안사가 압수했던 겁니다. 당시 나 기자가 렌즈로 본 팀의 모습은 매우 긴박해 보였습니다.
나경택
"공수부대에 맞을 각오를 하고 저렇게 했던 것이죠. 그런 마음, 그런 용기를 보며 사진기자로서 '저건 역사다'라는 생각에 기록했던 겁니다."

팀 바로 뒤에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남성 또한 그를 또렷이 기억합니다. 전일빌딩 건너편, 당시 광주관광호텔(현 무등빌딩) 앞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의사가 아닌, 당시 광주CBS 보도부 차장이었던 노병유 기자는 최루탄을 피해 들어갔던 작은 병원에서 부상자를 부축해 온 팀을 처음 만났습니다.
노병유 (5·18 당시 광주CBS 기자, 팀 원버그와 들것으로 환자 후송)
"그때 팀을 보니까 입술에 피가 이렇게 묻어 있어요. 이렇게 흘러내린 피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팀 원버그와 들것에 실린 환자를 이송한 노병유 전 광주CBS 기자(왼쪽)와 나경택 전 전남매일 사진기자를 지난 3월 금남로 일대에서 만났다.
ⓒ 강상우
노 기자는 병원장으로부터 의사 가운을 빌려 입고 피를 흘리고 있던 팀과 함께 병원을 나섰습니다. 두 사람이 들것을 든 모습은 당시 광주 동구청 상황일지에도 남아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람한 일지에는 "CBS 노병유(보도부 차장), 미국인 1명. 남자 1명 머리 박살. 단가(들것을 뜻하는 '담가'의 오기)에 싣고 관광호텔 쪽으로 감"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노병유
"'이 환자, 우리 병원에서는 힘들다' 그런 이야기를 팀과 병원장 둘이 하고 있었어요. 그냥 평상복으로 가면 힘들 것 같고 '내가 빨리 의사 옷을 입어야 되겠다' 생각해 병원장에 가운을 달라고 했어요. 앞에 팀을 세운 것은 '외국인이니까 아무래도 좀 괜찮겠지' 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진을 보면 팀도 얼굴에 손을 대고 있잖아요. 아마 최루가스 때문일 것입니다."

광주를 덮친 국가폭력의 격랑. 팀은 미처 피할 수 없었고, 애써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우연히 광주에 연루된 그는, 망설이지 않고 연대를 택했습니다.
서나래
"당시 주한 미대사관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에게 '광주에서 돌아다니지 말라', '즉각적으로 미문화원 광주분원으로 모이라'고 했지만 팀과 동료들은 광주에 남았습니다. 이들에게 광주는 위험한 곳, 낯선 곳이 아니라 본인이 살던 곳이자 이웃과 친구들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경남
"광주 사람들,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인터뷰를 했던 것이죠."

노병유
"자기 목숨을 내건 것이죠. 그때 당시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외국인에다가 군인들이 그렇게 많았는데요. 이 사람 안에 어떠한 믿음이 없었다면 할 수 없었던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기록한 광주 동구청 일지를 지난 3월 11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확인했다. 일지 중 5월 19일 부분에 "CBS 노병유(보도부 차장), 미국인 1명. 남자 1명 머리 박살. 단가(들것을 의미하는 '담가(擔架)'의 오기)에 싣고 관광호텔 쪽으로 감"이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에서의 "미국인 1명"은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광주에 머물던 팀 원버그이다.
ⓒ 강상우
[#3 냉면 좋아했던 청년]

팀이 속했던 평화봉사단은 1960년대 미국 정부가 만든 청년 봉사단체입니다. 단원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 파견됐고 의사를 꿈꿨던 팀은 광주에 배치돼 의료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서나래
"평화봉사단원들의 경험이 일종의 스펙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보건, 임상 현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미국에 돌아가서 의대에 진학할 때 굉장히 좋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팀 역시도 이를 고려했을 것입니다."

냉전 시대에 만들어진 평화봉사단은 미국 정부의 영향력 확대라는 목적도 갖고 있었으나 원칙적으로는 단원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1980년 5월 이전, 팀 역시 여느 단원들처럼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고진석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 팀 원버그와 봉사활동)
"그때는 뭐 돈도 많지 않으니까 깍두기에 소주나 막걸리를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미국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1978년부터 광주에 머문 팀 원버그가 나주 호혜원(한센인 정착지)에서 의료 봉사를 하는 모습.
ⓒ 폴 코트라이트 제공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들은 봉사 현장에서의 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안영주 ( 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 팀 원버그와 봉사활동)
"환자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아주 친절히 대했고 저희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아 긴밀히 서로 도움을 주면서 활동했었습니다."

고진석
"광주의 한 갱생원으로 봉사 활동을 자주 갔었습니다. 노숙자 수용 시설인데 환경이 굉장히 열악했죠. 뒤져보면 구더기가 드글드글할 정도고 위생 환경이 좋지 않아 (수용자들) 머리에 이가 막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외국에서 온 팀이 너무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1978년부터 광주에 머물렀던 팀 원버그와 봉사 활동을 했던 안영주(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 현 안영주내과의원 원장)씨가 사진 속 팀 원버그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윗줄 맨 왼쪽이 고진석(당시 전남대 의대 학생, 현 고진석외과 원장)씨, 바로 오른쪽이 안씨다.
ⓒ 강상우
팀은 충장로우체국 옆에 있던 음악감상실을 자주 찾았습니다. 그곳 DJ에게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를 신청했고 신청곡이 나오면 주스를 DJ에게 건네며 두 사람은 가까워졌습니다. 그때 그 DJ 이흥철씨는 팀이 한국말을 매우 잘했다고 떠올렸습니다.
이흥철 (당시 음악감상실 DJ, 팀 원버그 친구)
"100점 만점에 한 90점 이상 되지 않을까. 그 정도로 한국말을 참 잘했어요."

고진석
"'그랑께'이런 말도 썼던 기억이 나요. 좀 서툴기는 하지만 우스개 이야기로 전라도 사투리까지 섞어 썼던 것 같아요."

특히 비빔냉면을 자주 먹었다는 팀은 한국의 매운맛에도 잘 적응...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넘어 차츰 한국 문화에 젖어 들었습니다.
이흥철
"어린애들이 젓가락질 하듯이 좀 부자연스러운데도 (비빔냉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기억나요. 매운데 표시 내지 않으면서도 먹고 나서는 매워하는 그런 표정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죠."

서나래
"(팀은) 한국의 국악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시조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래서 시조를 번역하는 작업도 했었고요."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1978년부터 한국에 머문 팀 원버그가 한국식 좌식 밥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
ⓒ 록산 원버그 윌슨 제공
음악감상실에서 만나던 DJ와 단골 손님은 1980년 5월 항쟁의 한복판인 전남도청 앞에서 마주했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시공간. 이흥철씨는 의아했습니다.
이흥철
"'어? 왜 못 도망갔지? 광주에서 나가야 하는데 왜 저 양반이 못 갔지?' 그런 생각이 들었죠."

DJ였기에 방송장비를 다룰 수 있었던 이씨는 5·18 당시 가두방송 차에 탑승해 있었고, 팀은 그런 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이흥철
"반가워서 인사하다 보니 (팀이) '궁금하다'는 거예요. 대치 상황이나 이런 것이. 그래서 차에 타라고 뒷자리를 마련해 주고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한 백운동 쪽이나 쌍촌동, 그때 지금은 농성광장인 그때 당시 공단 사거리 그쪽을 돌아보고 처참한 걸 많이 보여줬죠."

그날 오후, 팀은 다시 이씨를 찾아와 대뜸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의아했지만 팀을 믿고 따라간 이씨는 깜짝 놀랐고 그에게 처음 싫은 소리를 했습니다.
이흥철
"팀이 비장한 모습을 보이면서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갔는데 2층이었어요. 거기 기자들 대여섯명이 앉아 있는 거예요. 취재하기 위해서. 깜짝 놀랐죠."
 충장로우체국 옆 음악감상실 DJ였던 이흥철씨는 그곳을 자주 찾았던 팀 원버그와 자주 교류했다. 두 사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만났다. 팀 원버그의 요청에 따라 외신기자와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이씨가 지난 3월 9일 당시 인터뷰를 했던 장소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
ⓒ 강상우
이씨와 함께 옛 전남도청을 찾았습니다. 건물 오른편으로 향한 이씨는 당시 불안했던 상황을 생생히 전했습니다.
이흥철
"여기가 전부 다 식당이었어요. 저 의자, 소나무 있는 데. 그 정도에 (당시 외신기자들) 숙소가 있었던 거죠. 팀이 기자들의 질문을 통역하면 제가 답했고 제 이야기를 다시 통역해 기자들에게 알려줬죠. 그날 비가 좀 내렸는데 마음도 스산하고 왠지 모르게 불안해 죽겠는 거예요. 30분 정도 흘렀을까? 더 이상 '못 하겄다'하고 팀에게 이야기하고 나왔죠."

팀은 외신기자와 직접 인터뷰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인터뷰를 주선하고 통역을 도맡기도 했습니다. 당시 얼굴이 드러나거나 인터뷰를 했다가는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도 있던 상황. 팀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던 이씨는 이제는 그때가 자꾸 눈에 밟힙니다.
이흥철
"외부에 알려야 했잖아요. 광주가 고립돼 있었으니까. 그 역할을 팀이 해준 것 같아요. 그때 더 잘 해줄 걸 미안한 마음이죠."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4 신군부 뒤흔든 용기]

팀은 한 발 더 나아갔습니다. 5·18 이후 그는 수동적 중개자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 제보자로 나섰습니다. 그로 인해 학살의 책임자이면서 진실을 은폐하려던 신군부는 발끈했고 정부는 평화봉사단 추가 파견에도 제동을 걸려고 합니다.

제임스 메이어 (마지막 주한 평화봉사단장/1978-1981)
"말 그대로 '폭탄' 같았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사실상 평화봉사단이 떠나기를 바라는 분위기였습니다."

폭탄과 같았다는 이 사건은 당시 외무부 기밀문서에서도 확인됩니다. 이 문건에 따르면, 1980년 7월 18일 이계철 외무부 미주국장은 블랙모어 주한 미대사관 정무참사관을 불러 면담하고 이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보고합니다. 당시 국보위의 수장은 내란 우두머리 전두환이었습니다.
제임스 메이어
"아직 대통령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전두환은 군 내부에 있으면서 이 일이 자신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을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팀 원버그, 데이비드 돌린저, 캐롤린 투르비필, 스티븐 헌지커에 의해 1980년 7월 보도된 5·18민주화운동 관련 스웨덴 등 외신보도와 관련해 외무부가 생산한 기밀문건 중 일부. "국보위 보고사항", "중앙정보부", "적절한 조치 강구", "봉사단원의 철수", "Ⅲ급비밀", "대통령 각하, 국무총리" 등의 문구와 함께 팀 원버그, 데이비드 돌린저의 이름이 보인다.
ⓒ 외교사료관 제공
이뿐만이 아닙니다. 7월 22일에는 청와대, 외무부, 문화공보부, 과학기술처, 문교부, 보건사회부 관계자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회의를 엽니다. 7월 25일엔 박동진 외무부 장관이 몬조 주한 미대사대리를 부르고, 같은 날 외무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립니다. 9월 6일엔 전두환에 이어 중앙정보부장을 맡고 있던 유학성이 외무부 장관에게 직접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라는 공문을 발송합니다.

이는 모두 팀에서 시작된 5·18 외신 보도 때문이었습니다. 팀은 영암에서 근무하던 평화봉사단원 데이비드 돌린저와 서울로 이동해 또 다른 평화봉사단원들에게 증언과 자료를 건넸고, 이를 받은 두 사람은 스웨덴으로 건너가 AP, AFP 등의 대대적인 보도를 이끌었습니다.

데이비드 돌린저
"와, 이 기밀문건은 처음 보는 건데요. 저와 팀은 (미국 당국으로부터) 우리가 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입을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했죠."
 지난 3월 16일과 19일 화상으로 인터뷰한 데이비드 돌린저(왼쪽)와 캐롤린 투르비필. 두 사람은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한국에 머물며 팀 원버그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이 외신에 보도되도록 제보한 인물이다.
ⓒ 소중한
팀과 데이비드로부터 자료를 받은 이들은 캐롤린 투르비필과 스티븐 헌지커. 스티븐은 안타깝게도 2014년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캐롤린에게 46년 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캐롤린 투르비필 (팀·데이비드에게 받은 자료로 스웨덴 언론에 제보)
"당시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였고 팀과 데이비드는 괴로워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든 설명하려 했지만 그 참상을 말로 다 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팀, 데이비드 그리고 캐롤린과 스티븐의 이름은 외무부 기밀문건에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문건에서도 느껴지는 서슬 퍼런 상황. 그럼에도 네 사람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캐롤린 투르비필
"팀과 데이비드는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세상에 알리려는 강한 의지와 용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주한 미대사관마저 그들을 위축시켰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고 위르겐 힌츠페터의 촬영 테이프에 담긴 영상 갈무리.
ⓒ 위르겐 힌츠페터, 5·18기념재단 제공
나중에 철회하긴 했지만 한국 정부는 미국 시애틀에 모여 곧 입국하려던 차기 평화봉사단원들을 받지 않겠다며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제임스 메이어
"강 국장(강박광 당시 과학기술처 기술협력국장)과 만났을 때, 그는 한국 정부가 신규 단원의 파견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약 정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파견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고 그 뜻을 본부에 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그 결정은 한국 정부에 대외적인 부담을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캐롤린 투르비필
"저와 스티븐은 두려웠지만 팀과 데이비드로 인해 스웨덴까지 가서라도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주한 평화봉사단장인 제임스 메이어와 지난 3월 18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 소중한
[#5 붉은 단풍나무]
록산 원버그 윌슨 (팀 원버그의 누나)
"우리는 유해를 뿌리고 붉은 단풍나무를 심었어요."

- 그때는 나무가 작았나요?
"작았어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아마 33년 정도 됐으니 나무가 훨씬 자랐죠."

미국 미네소타주 브레이너드. 지병을 앓던 팀은 1993년 고향인 이곳에서 영면했습니다. 여전히 팀의 재킷을 간직하고 있는 그의 누나 록산을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록산은 팀이 죽기 직전까지 광주를 이야기했다고 떠올렸습니다.

*내일(5월 19일) 2부로 이어집니다.
 팀 원버그의 누나 록산 원버그 윌슨이 지난 3월 1일 미국 미네소타 브레이너드(남매의 고향)의 그레고리 공원을 찾아 1993년 숨진 동생의 유해를 뿌린 나무에 헌화한 뒤 생각에 잠겨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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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보태주세요. 오마이뉴스는 다큐멘터리 영화 <내 이름은 원덕기>를 제작하기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에 펀딩 참여자의 이름을 기재할 계획입니다. 대한민국, 그리고 광주를 사랑한 팀 원버그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기획 소중한 취재 소중한·전선정·김화빈·이진민·유지영
촬영 강상우·이희훈 편집 콘텐츠팜 호미
CG 김수연 타이틀 김소설 음향 DMC 사운드 비전 내래이션 이승준
펀딩 기획 장유정·이기종·봉주영
영상 제공 5·18기념재단·루먼 형제(Ben&Sam Luhmann)
영상 번역 자문 로버트 그라찬
사진·자료 제공 고진석·나경택·서나래·유경남·변재원·안영주·록산 원버그 윌슨·데이비드 돌린저·폴 코트라이트·캐롤린 투르비필·케빈 페어뱅크스·로버트 그라찬·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외교사료관·박지원 의원실
촬영 협조 5·18기념재단·5·18민주화운동기록관·전남대병원·전일빌딩245·국가보훈부·별밭·필로스팅하우스
제작 지원 광주광역시·광주광역시 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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