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투자의 일상화 시대에 다시 묻는 노동의 가치

김선미 2026. 5. 1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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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경제부 기자

최근 만난 한 금융권 인사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를 언급하며 한 말에 쓴웃음이 났다. 그는 “근대 자본주의에선 근면·절제·재투자가 미덕이었는데 요즘은 레버리지·단타·부업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레버리지와 단타는 부채를 일으키는 것과 단기 투자를 뜻한다. 부업은 본업을 젖혀두고 주식 창을 보거나 부동산 공부를 하는 ‘투자의 일상화’ 현상을 가리켰다. 그는 “일하는 데 에너지를 아끼고 근무시간이나 그 뒤에 투자에 힘을 쏟는 게 현명한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영국 경제학자 수전 스트레인지가 1986년 출간한 동명의 책에서 사용한 ‘카지노 자본주의’는 현대 자본주의가 실물경제와 동떨어져 일종의 거대한 도박장처럼 변한 현상을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이 산업 현장에서 금융으로 옮겨가고, 나아가 투기 자본에 휘둘릴 때의 폐해를 비판하는 의미가 담겼다. 코스피 지수가 7개월여 만에 두 배로 뛰는 불장에, 월급의 여러 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하루에 벌고 잃거나, 빚투(빚내서 투자)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이라는 이야기들을 보고 듣고 있으니 40여 년 전 경제학자의 우려가 떠올랐다.

지난 15일 코스피가 장중 사상 처음으로 8000포인트를 돌파했다가 급락해 7490선에서 거래를 마감했다. [뉴스1]

물론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에도 어두운 단면은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고, 투자와 투기 간 경계는 무 자르듯 나눠서 정의하기 어렵다. 최근 이런 현상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지폐를 인쇄라도 하듯 돈을 버는 ‘돈 복사’ 시대에 포모(FOMO·소외 불안)가 오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여기에 갈수록 부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인공지능(AI) 시대까지 겹쳐 노동시장에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지도 더욱 불투명해졌다. 최근 한국리서치 설문조사(전국 성인 1000명 대상)에 따르면, 자산 가격과 물가 상승으로 노동의 가치가 감소했다고 응답한 비율은 88%였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경제에서 부동산 급등, 증시 활황, 암호 화폐 열풍 등을 거치며 노동의 가치가 급락한 점이다. 경제활동 주체들의 업무 몰입도와 근로 의욕이 떨어지면 결국 장기적으론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일 땀 흘려 상품·서비스를 만들고 세상을 움직이는 역할은 대체되거나 배제될 수 없다. 노동 의욕이 거세된 사회는 성장 동력을 잃고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

노동이 생계를 넘어 자아와 행복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개인이 세상을 바꾸고 자아를 실현하는 모든 과정엔 크고 작은 노동이 있었다. 땀 흘리는 모든 이들이 일하며 성취감, 효능감, 자부심 등을 느낀 순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김선미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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