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들고 학교 간 아이, 교사가 거절하며 건넨 씁쓸한 말

이경숙 2026. 5. 1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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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이 지킨 청렴, 그 대가로 잃어버린 것들... '무균실' 되어가는 교실이 회복해야 할 가치

[이경숙 기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았던 해, 스승의 날이었다. 우리 반 아이의 어머니가 감사의 마음이라며 편지와 함께 3만 원권 상품권을 건넸다. 손에 쥔 봉투가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기쁘기보다 몹시 불편했다. 아이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종이 몇 장으로 계산되는 듯해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당장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단호한 거절이 어머니의 진심에 상처가 될까 마음이 걸렸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내가 아끼던 책 한 권을 사서 그 안에 편지를 끼워 상품권과 함께 돌려보냈다. 받고 싶지 않은 '원칙'과 상처 주고 싶지 않은 '배려' 사이에서, 당시의 초임 교사가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거절이자 청렴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2016년, 이른바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사회 전반에 시행됐다. 나는 처음 이 법의 도입을 두 손 들어 반겼다. 이제 학부모의 호의를 법이라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정중히 거절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이 법이 왜 교실에 당도해야만 했는지 안다. 과거 교육 현장에는 촌지라는 이름의 부끄러운 관행이 있었고, 부모의 재력에 따라 아이를 향한 교사의 미소가 달라지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법은 그 썩은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불가피한 메스였다.

하지만 법은 환부만을 도려낸 것이 아니라, 교실에 흐르던 피와 온기마저 모조리 뽑아내 버렸다. 앙상한 법조문이 교실이라는 유기적인 공간에 뿌리내리는 방식은 너무도 기계적이었다.

이 법의 본래 취지는 사회 깊숙이 뿌리박힌 부정청탁 등의 비리를 타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풍경은 어떠한가. 거대 권력 앞에서는 '직무 관련성'을 따지며 유독 관대하게 작동하는 듯 보이는 법망이, 엉뚱하게도 가장 힘없고 소박한 교실 바닥으로 떨어져 아이들의 연약한 마음을 베어내는 데 쓰이고 있다.

돼지감자를 들고 집으로 되돌아가던 아이

법 시행 초기의 일이다. 학교까지 도보로 40분을 걸어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묵직한 검은 비닐봉지를 낑낑대며 들고 등교했다. 부모님과 함께 직접 농사지은 돼지감자였다. 평소 열정적인 수학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아이의 얼굴빛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선생님이 안 받으신대요. 이거 받으면 감옥 가신대요."

올 때보다 몇 배는 더 무거워졌을 그 비닐봉지를 들고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법은 절차적 청렴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진심이 거절당했다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조차 한 발 물러섰다. 당장 아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 감자를 건네받고 싶었지만, '혹시 누가 국민신문고에 신고하면 어쩌지'라는 자기검열이 나를 멈춰 세웠다. 그날 교무실의 어른들은 법 앞에서는 깨끗했지만, 아이의 마음 앞에서는 너무나 비겁했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몇 해 뒤엔 현장에 있던 동료에게서 더 씁쓸한 이야기를 들었다. 스승의 날, 아이들이 용돈을 십시일반 모아 준비한 작은 케이크를 받고 교실에서 함께 촛불을 불었던 교사가 누군가의 민원으로 교육청 조사를 받고 주의 처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부패했기 때문에 징계를 감수해야 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차가운 법전의 문장보다 촛불을 켜고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먼저 읽었을 뿐이다. 규정의 언어로는 명백한 위반일지 모르나, 교육의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스승과 제자가 나눈 '정서적 연대의 의례'였다. 만약 그가 "법 때문에 안 된다"며 케이크를 든 아이의 손을 내쫓았다면, 행정적 청렴은 지켰겠지만 교실을 떠받치던 신뢰의 온기는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나는 기계적 제도가 낳은 끔찍한 역설과 마주했다. "타인의 얼굴 앞에서 응답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윤리"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흙 묻은 돼지감자를 들고 서 있던 아이의 붉어진 뺨과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설레던 아이들의 눈빛. 그 얼굴을 외면한 채 법조문만을 방패 삼는 일은 행정적으로는 올바를지 몰라도, 윤리적으로는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차가운 폭력이다.

이제 교사들은 아이의 진심을 어떻게 부드럽게 거절할지, 혹은 그 마음을 어떻게 다치지 않게 어루만질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김영란법 때문입니다" 한 줄이면 모든 설명이 끝나는 교실이 되어 있었다. 법은 부패를 막는 방어막이 아니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체온을 차단하는 벽이 되어가고 있다.

청렴과 비정 사이에서

청렴과 비정은 종종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깨끗함을 유지하려다 온기를 잃는 순간, 교육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오류를 통제하는 '관리'로 전락한다. 부당한 뇌물을 단호히 잘라내는 공적 엄정함과, 타인의 다정한 마음마저 베어버리는 비정함은 분명 다른 층위의 문제다. 그러나 지금의 기계적인 시스템은 그 미세한 온도의 차이를 헤아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교육은 냉혹한 심판대가 아니라 흠결 있는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회복해 나가는 공간이어야 한다. 교실은 점점 '무균실'이 되어간다. 깨끗하지만 숨 막히는 공간, 고마움도 미안함도 오갈 수 없는 완전 멸균된 관계. 그 안에서 자라는 건 신뢰가 아니라 불신의 공기다.

완벽하게 멸균된 교실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 제도의 깨끗함이 사람의 체온을 밀어낸다면 그곳은 학교가 아니라 박제된 공간에 가깝다. 나는 여전히 다칠지도 모르는 관계의 현장에 남아 있으려 한다. 숫자로 기록되는 무결함보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책임을 철저히 감당하는 일. 그것이 무균실이 되어버린 교육이 끝끝내 잃지 말아야 할 마지막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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