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해제 됐던 경호실이 해체되지 않은 까닭은...
[김수병 기자]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총성은 단순히 한 대통령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청와대 권력 구조 전체를 붕괴시킨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 권력의 심장을 지키던 조직인 경호실의 운명까지 겨눈 탄환이었다. 박정희의 심장을 멈춘 총성은 유신체제의 종식을 알렸지만, 그 거대한 파고를 가늠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통령을 지키지 못한 조직, 더구나 대통령보다 먼저 경호실장이 쓰러졌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치명적이었다. 경호실은 자신들이 구축해온 완벽한 동선과 포위망이 한순간에 무력화되는 전례 없는 붕괴의 순간을 목격해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이제 경호실은 존재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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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년 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호실 작전차장보 이취임식에서 휘장을 달아주고 있다. |
| ⓒ 대통령경호처 |
10·26 사태 직후 선포된 비상계엄 아래에서, 계엄군은 곧바로 경호실의 무장을 해제했다. 권력의 중심에서 철통같은 경계를 자랑하던 조직이 단숨에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당시 상황을 취재한 언론은 "청와대 경호라인은 사실상 해체 상태에 가까웠다"고 전했다. 특히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차지철의 존재는 경호실 자체를 위태롭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 말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이었고, 그의 영향력 아래 놓였던 경호실 역시 단순한 경호 조직을 넘어선 존재로 인식되었다.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차지철 체제의 경호실은 사실상 하나의 권력기관이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경호실이 대통령을 보호하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 권력의 문지기이자 정치적 방패로 기능했다는 평가였다.
경호실 해체를 염두에 둔 조직 정비는 계엄사령관 정승화의 주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33헌병단은 전원 헌병대로 복귀했고, 육영수 피격 사건 이후 대통령 경호 임무에 투입되었던 66특공대의 후신인 606특공부대 역시 특전사로 원대 복귀했다. 그러나 606특공부대는 해체되지 않고 경호 특기를 활용해 중앙정보부장과 국군 보안사령관 숙소 경호를 맡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전두환과의 특수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었다. 조직 개편과 함께 내부 숙청도 피할 수 없었다. 차지철 체제에서 수행과장을 지낸 한 퇴직 경호관은 "어제는 본부장급, 오늘은 부장급, 내일은 과장급을 계엄사에서 불러 조사한 뒤 사표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결국 경호실 간부는 과장급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증언했다.
차지철 체제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들은 대거 퇴진했고, 경호실은 사실상 새롭게 편성된 조직에 가까운 모습으로 재편되었다. 당시 정치권의 한 인사는 "경호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도려낼 수밖에 없었다. 차지철 체제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조직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비상계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러한 변화는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 외부 권력에 의해 강제된 조치에 가까웠다. 실제로 경호실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부 언론은 "경호실이 정치적 기능을 제거하고 본래의 경호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이미 해산 계획이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접어든 상황에서 이러한 요구는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했다. 결국 경호실은 박정희의 죽음과 궤를 같이하며, 역사 속으로 퇴장할 가능성 앞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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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규하 대통령은 경호실을 신뢰하지 못해 한동안 경호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
| ⓒ 대통령경호처 |
그렇게 위태롭던 경호실의 운명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 세력의 총성이 권력의 지형을 다시금 뒤흔들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제거하고 군 내 권력을 장악했다. 12·12 쿠데타는 경호실에 또 하나의 시험대를 던졌다. 군 내부 권력투쟁 과정에서 경호실은 마치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게 된 것처럼, 그 자체로도 흔들리고 있었다. 경호실은 대통령 직속 기관이면서, 동시에 군 출신 실세들이 다수 포진한 조직이었다. 군 권력의 이동은 곧 경호실 권력의 이동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신군부는 경호실을 단순한 경호 조직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경호실은 청와대 권력의 핵심 인프라이자, 내부 정보가 집중되는 중심축이었다.
피경호인이 사라진 상황에서 경호실은 조직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할 여력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판단에 따라야만 했다. 신군부가 경호실 해체를 밀어붙이지 않은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대통령 시해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국가 권력과 경호체제의 극단적인 취약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는 곧 새로운 경호체제의 필요성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안전은 국가 안정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였고, 군이든 경찰이든 어떤 기관도 대통령 경호를 즉각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경호실을 없앨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대통령을 누가 지킬 것인가"라는 현실적 난제로 되돌아왔다.
12·12 군사 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이던 신윤희는 자신의 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하며 신군부의 흐름에 몸을 실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신군부는 경호실 간부들의 집단 퇴진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을 군 출신 인사들로 촘촘히 채우며 조직 재편에 착수했다. 그 과정에서 경호실은 더 이상 단순한 경호기관에 머물지 않았다. 권력 재편의 핵심 장면 속에, 경호실은 대통령을 지키는 기관이 아니라 권력 구조 자체를 재편하는 정치적 장치로 변모해 갔다. 당시 언론이 "청와대 주변 권력기관의 인적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고 전한 것은, 단순한 인사 이동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 자체가 재배열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였다.
신군부의 의도는 단순한 장악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들은 경호실을 권력의 주변부 기관이 아니라, 권력을 지탱하고 확장하는 핵심 장치로 다시 정의하려 했다. 경호실은 점차 보이지 않는 손처럼 권력의 동선을 설계하고, 위기와 기회를 선별하는 역할까지 떠안게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10·26 사건 직후 거세게 제기되었던 '경호실 해체론'은 서서히 힘을 잃었다. 체제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는 점차 희미해졌고, 대신 질서 회복과 안정을 명분으로 한 권력 재편 논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해체의 요구가 잦아든 자리에 들어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공고해진 조직과, 그 조직을 매개로 한 군의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개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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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년 1월11일 정동호 경호실장 권한대행이 주재하는 간부 작전회의가 열리고 있다. |
| ⓒ 대통령경호처 |
국보위 상임위원장 경호대를 기반으로 편성된 27특공대는 경호실 장악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이어가기 시작했다. 현역 육군 장성인 정동호 체제 아래, 보안사령부 사령관 고명승이 차장으로 자리 잡은 이중 구조는 권력의 결을 바꾸는 상징이었다. 두 사람은 경호실 요원과 27특공대원을 1대1로 묶어 합동 근무를 하도록 하며, 조직의 성격 자체를 군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당시 경호실의 핵심 간부였던 한 퇴직 경호관은 "대통령 경호 임무를 사실상 인수인계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하며, 경호실을 12·12 군사 반란의 핵심 장교들에게 경호권을 넘겨주는 군 중심 구조로 재편하려는 의도였다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한 인력 재배치가 아니라, 경호의 영역마저 군 권력의 궤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구상이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당시 27특공대는 경호실의 근접 경호를 완전히 접수하진 못했지만, 대통령 경호에 투입되는 데는 성공했다. 1선은 경호실이, 2선은 27특공대가 담당하는 구조로 배치되며 경호의 군사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신군부는 경호실에 군대식 조직문화와 작전 개념을 더 강하게 주입했다. 경호는 더 이상 대통령 주변을 지키는 단순한 업무가 아니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권력체제를 방어하는 작전"으로 재정의되기 시작했다. 경호요원들의 훈련도 강화되었고, 총기훈련과 대테러 훈련이 확대되었으며 작전 개념도 세분화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전두환 경호 시스템의 밑그림을 따라 체계적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군 특수부대 출신의 한 퇴직 경호관은 신군부의 경호실 재편기를 두고 "현대적 경호체제의 기반이 만들어진 시기"라고 평가하면서, "10·26 이후 경호실은 대통령을 지키는 것보다 체제를 지킨다는 느낌이 훨씬 강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사실상 "체제를 지킨다"는 말이 곧 신군부의 지침에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최규하가 대통령이었지만, 신군부가 장기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전두환의 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호실은 폐지하기에 아까운 기관이었다. 신군부에게 경호실은 권력의 안전장치였고, 대통령을 지키는 조직이 무너지면 정권 자체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렇게 경호실은 산소호흡기를 매달고 조직을 대폭 정비하게 되었다. 신군부에게 경호실은 권력의 안전장치였다. 대통령을 둘러싼 가장 가까운 방패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권력은 언제나 불안정한 법이고, 특히 군사 쿠데타를 통해 등장한 정권은 정치적 정당성이 더 취약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경호는 단순한 신변 보호를 넘어 체제 안정의 핵심 장치 구실을 했다. 경호실이 강해질수록 권력의 물리적 안전도 강화된다는 믿음이 있었다. 경호실은 조직의 존폐 위기를 넘기기 위해 신군부에 편승했고, 신군부는 체제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경호실을 선택한 셈이었다. 양자 간의 전략적 제휴 덕분에 경호실은 결국 산소호흡기를 뗄 수 있었다.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최규하의 잔여 임기를 채울 후임자를 뽑는 보궐선거에서 전두환은 단독으로 입후보했다.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에서 2525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은 2524표(99.96%)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때 경호실은 당선자의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당선 이후에도 27특공대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보위 상임위원장 경호팀이 당선자 경호를 계속 맡고 있었다. 취임식 행사를 위해 9월 1일 국보위 상임위원장실을 찾은 한 퇴직 경호관은 "27특공대가 근무를 서고 있는 상임위원장실로 들어가 '모시러 왔습니다'라고 했더니, '어, 그래'라고 답하신 뒤 경호실장 임명안에 재가한 뒤 대통령 전용차량에 올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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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 관계자들이 1979년 4월 5일 식목행사를 마치고 녹지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 천병득 제공 |
국가 권력은 항상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패를 필요로 한다.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중심이 존재하는 한, 그를 둘러싼 경호체제도 사라지기 어렵다. 10·26 사태 이후에도 혼란 속에서 경호실이 유지된 근본 이유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경호대상자의 심장을 겨눈 총성도 경호실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경호실은 시대의 권력과 함께 형태를 바꾸며 살아남았고, 그렇게 변형된 경호체제 위에서 제5공화국의 권력이 출범하게 되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대통령을 지키는 조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조직이 누구를 위해, 어떤 체제를 위해 존재하는지는 때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다.
만약 10·26 사태 이후 12월 12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경호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정승화의 경호실 해체 구상이 무리 없이 추진되면서, 민간 경호는 막을 내리고 군 특수부대 중심의 경호 체계가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권력의 탱크가 멈추고 부마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서울의 봄'이 지속되었다면, 경호실은 더 이상 요새의 수호자가 아니라 변화의 문지기로 새롭게 자리매김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경호실이 해체되었다면, 외부의 통제와 내부의 견제가 균형을 이루는 새로운 국가 경호기관이 탄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권력은 경호기관의 이러한 대안적 진화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경호실은 권위주의의 껍질을 벗고 민주주의의 등불로 거듭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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