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충주, 유독 피해 컸던 까닭

나일영 2026. 5. 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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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충주로 들어서며

[나일영 기자]

해남에서 출발한 도보 여정이 드디어 3월 28일 관주고개를 넘어 충주로 들어섰다. 충주는 국토의 중앙에서 신라 때부터 중원(757년 중원경 설치)으로 불렸던 땅이다.

지리적 환경으로 봐도 충주는 남한강 수로와 조령(문경새재)의 육로가 지나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다. 중앙탑(국보 제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이 중원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한반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구려비(국보)는 이 땅이 얼마나 중요시 됐는지 단적인 증거가 되고 있다.

그만큼 시련이 많았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차지하며 각축을 벌였고, 임진왜란 때는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우리가 걸어가며 볼 곳이므로 아픔을 극복한 충주의 진면목과 현재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그 때를 회상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 탄금대가 있는 대문산에 충장공 신립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1592년 4월 28일(음력) 도순변사 신립장군과 장졸 8천여명이 왜적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 전적지에 세워져 혼불로 산화한 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다.
ⓒ 사단법인 한국사람길
임진왜란사 중원 책임 다한 충주

임진왜란 때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군하던 왜군과, 처음 전열을 갖춰 왜군과의 일전을 준비한 우리 군이 정면 충돌한 곳이 이곳 충주다.

왜군은 조령을 넘어 충주에 들어서면서 매우 조심스레 기동했다. 충주 입구에 버티고 선 대림산성을 피해 달천강을 건너 풍동으로 돌아서 충주 단월역에 도착했다. 충주에 들어선 다음에도 본대와 좌군, 우군 등 세 갈래로 나눠 충주읍성을 애워싸며 탄금대 방향으로 진군했다.

오늘 출발하는 관주고개는 왜군 중 우군이 충주의 남동 쪽을 애워싸고 있는 남산과 계명산 자락으로 돌아가기 위해 넘던 고개다. 충주는 전체가 자연 요새의 지형을 하고 있다. 서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남동쪽은 남산과 계명산이 둘러쳐져 적을 방어할 여러 작전이 가능했다. 왜군도 이 점을 우려해 달천 주변의 방어 상황을 살피며 단월역에 들어왔다. 이후 좌군은 달천을 따라 탄금대 쪽으로 진행하고 우군은 남산과 계명산에 매복병이 있는지를 탐색하기 위해 원거리로 돌아서 탄금대 후방으로 나아갔다.

본대는 곧바로 충주읍성으로 들어가 거의 무혈입성했다. 뒤따라온 예비대까지 1만700명이 충주성에 진을 친 후 본대 7000명이 탄금대로 향했다. 이렇게 왜군은 우군, 좌군을 합해 총 1만8700명이 탄금대로 협공해 들어왔다.

신립 장군은 왜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했나

신립 장군이 이끄는 우리 군은 어떻게 대비했을까. 당시 왜군의 북상 소식을 들고 명장 신립 장군의 명성으로 서울에서 100여명의 군관과 전마를 이끌고 출발했다. 오는 도중 충청도 군현의 군사를 모아 8천 명을 만들었다. 대부분 졸속으로 징발된 군사들로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의기만 있었을 뿐 전문적 군사교육이나 전장 경험이 없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15세기 충주의 인구가 7452명이니 이후 150여년 후인 임진왜란(1592) 당시 군사 8천 명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충청도 군현의 장정들이 대거 모인 것이고, 충주 사민도 노약자를 빼고 거의 모인 숫자라고 볼 수 있다. 충주인들에게 신립 장군은 절대적인 의지처였다. 신립 장군의 지휘 아래 있으면 살 수 있고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피난 가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더 큰 피해를 키웠다.

신립 장군이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결전장으로 택한 것은 오늘날까지 패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립 장군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기마병(약 1000기 추정)을 활용할 수 있는 점, 탄금대를 빙 둘러싼 달천, 충주천, 금능천, 능암천을 자연 해자로 이용해 1,2,3차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는 점, 한나라 한신의 고사를 차용해 달천과 남한강을 뒤로 두고 죽기로 싸우겠다는 배수진을 친 점 들이다.

잊어선 안될 충주의 아픔

그러나 배수진을 친 군사들이 한나라 때처럼 고도로 훈련 받은 정예병이 아닌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는 오합지졸이었고, 무엇보다 적에 대해 너무 몰랐다. 적이 어디로 어떻게 어디까지 왔는지,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신립과 부장 이일은 왜군이 가까이 왔음을 알린 개령 사람과 조령을 넘었음을 알린 군관 안민을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참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척후도 대군에 차단되고 적의 동정을 알릴 백성도 없게 됐다.

갑자기 사방을 애워싸며 들이닥친 적의 출현은 군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럼에도 신립 이하 김여물 등 장수들이 앞장서서 사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미 대열이 무너지고 난 뒤의 고투였다. 처음엔 대문산 남쪽 평야지대에서 싸우다 방어선이 계속 무너지며 점점 뒤로 밀려났다. 중과부적이었고 전투력에서도 밀렸다.

우리 군 3000명은 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수백명은 포로가 됐고, 대다수는 강물에 투신했다. 신경의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1649)는 "쌓인 시체가 산과 같고 흐르는 시체가 강을 덮었다"고 기록했다. 신립과 김여물, 박안민 등 장수들도 왜군에게 죽으면 수급이 전시될 게 뻔한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투신 순국했다. 이로써 신립의 군대는 몇 명이 살아남은 것 외에 전멸했고, 충주는 임진왜란 중 가장 희생이 컸던 싸움터가 됐다.

조정은 1593년 탄금대 전투로 전사한 관군의 위령제를 위해 민충단을 설치했다. 지금은 없지만 1793년 달천가에 충신의 사단을 설치하고 순절한 날짜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크나큰 희생이었지만 우리 땅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백성들이 관군이 되고 의병이 되어 끝내는 이 땅을 지켜낸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고장을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희생된 수천 명의 영혼이 충주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이제 충주의 속살을 보기 위해 충주 시내로 발걸음을 옮긴다.
▲ 충주남산초등학교 올해 89주년을 맞은 충주남산초등학교가 633명의 학생과 넓은 교정을 갖고 유서 깊은 충주 남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 사단법인 한국사람길
충주 역사의 한복판을 흘러온 충주천

오른 쪽으로 남산과 계명산이 지키고 있는 호암동의 호암중앙1로를 따라 걷는다. 충주중학교와 충주여고, 충주남산초등학교가 있는 학교 동네 사이 길을 걷는다. 남산 초등학교에 "국원성 남산 기슭에 튼튼히 자리잡은..."라고 쓴 교가도 눈에 띈다. 고구려는 충주를 국원성으로 지칭하고 장미산성을 통치 근거지로 삼았고, 이후 충주가 신라 땅이 됐을 때는 통치성으로 남산에 남산성을 축조했다. 왜군들이 복병을 살피기 위해 우회했을 만큼 두려워했던 그 남산이다. 초등학교 때 서울 남산초등학교에 다녀서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이어 남산에서 발원한 충주천을 걷는다. 충주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탄금대 남서쪽을 달천과 함께 애워싸듯 흘러 탄금대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며 남한강의 두물머리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역사 굴곡의 한복판을 흘러온 이 충주천을 따라 충주 사과의 발생지 지현동, 지금은 젊음의 거리로 각광받는 충주 원도심과 충청 감영지, 그리고 중원 지방 답게 각지를 연결하는 물류의 중심을 대변하던 충주자유시장이 자리한다.

옹달샘 설화를 간직한 골목형 전통시장으로 자그맣지만 예쁜 옹달샘 시장 옆의 '동심 퐁퐁 동화길'로 들어서면서부터 지현동 사과나무 이야기 길이 시작된다. 충주 사과의 유래를 전해 주고 있는 충주 사과 유래비 공원을 지나면 낮은 언덕에 지현동의 지역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목표로 건립된 애플아트 뮤지엄이 자리하고 있다. 2022년 7월에 처음 개관했는데 휴관일이 아닌데도 문이 닫혀 있어 아쉬웠다.
▲ 옹달샘시장 옹달샘 설화를 간직한 작지만 예쁜 옹달샘 시장이 지현동 사과나무 이야기길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 사단법인 한국사람길
충주사과의 유래 마을

이어 언덕길을 잠시 더 오르면 충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넓직한 언덕 마루에 구 주택가가 빼곡히 들어서 있다. 주택가 골목도, 길 이름도 예쁜 '햇살 빛나는 길'이 담장마다 그림과 이야기로 치장하고 여행객들을 반긴다.

원래 이곳은 지곡동이었다. 고려 중엽에 충주목에 낙향한 노관이 이곳에 집을 지었는데, 조경을 하면서 계곡물을 끌어들여 집안을 돌아가게 곡수구를 만들어 지곡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지금은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큰 재배 조건으로 맛과 향이 좋다는 충주사과의 유래지가 되었다. 지현동이 옛부터 충주 원도심의 전형적인 주택가를 형성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다.

햇살 빛나는 길이 끝나는 곳에 도심으로 내려가는 두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도시재생사업 거점 공간 시설인 지현문화플랫폼이 산토리니 길로 연결된다. 이곳 지현동도 옛 주택가를 살리는 도시재생사업으로 재탄생한 동네다.

왼쪽으론 사랑의 계단이 보인다. 충주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과 그 한가운데를 차지한 사과나무 조형물이 예뻐 자동으로 발길이 간다. 예쁜 벽화로 장식된 계단을 내려선 바로 그곳이 충주에 사과나무가 처음 심어진 현 용운사지(지곡18길5)다. 골목마다 벽화와 카페가 예쁜 지현동 골목길을 통과해 충주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동, 젊음의 거리로 향한다.
▲ 사랑의 계단 지현동 햇살 빛나는 길 끝에 충주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사랑의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을 내려서면 충주사과가 처음 유래된 곳이 나온다.
ⓒ 사단법인 한국사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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