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지 누구에게나 공짜, 기부 끊이지 않는 도시의 비밀

이안수 2026. 5. 15.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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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장서 기증하고 도서관 운영 돕고... 오악사카 사람들의 나눔

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 <기자말>

[이안수 기자]

▲ 오악사카 주는 남한과 거의 같은 크기(93%)이다. 해발 0m 해안에서 3,200m 고산까지 각기 다른 지형에는 60여 개 이상의 언어·방언이 공존하는 16개의 주요 원주민 민족이 열대우림, 건조 사막, 온대 고산지 등 다양한 기후대에서 산·강·바다를 신성시하며 살고 있다. 지역 사회의 자치와 전통적인 관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이안수
"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호스텔의 옥상에서 아침을 먹다가 아내가 무심코 한 말이었다.

우리는 지난 유랑길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 어느 곳이 영원히 정주하고 싶은 곳인지 질문받곤 했다. 그때마다 즉답을 피했다. 그 어느 곳에도 영구히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말이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가 자신의 영혼을 포기해도 좋을 순간에 외쳤던 말,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말과 같은 무게로 느껴졌다. 신의 질서 속에서 인간을 시험하는 역할을 맡은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에서 영혼을 거래하는 사탄)에게 나는 아직 항복하고 싶지 않지만 아내의 이 말을 이곳 오악사카에서 일부분 수긍하게 된다.

오악사카 사람이 되어야 보이는 것들

오악사카 시내의 하늘은 미세먼지와 연무로 뿌옇다. 새벽 동이 트기 시작하면 도로 소음도 함께 시작된다. 분지 지형의 특성상 연무도 소리도 도시에 갇힌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비공식 노동에 의존하는 사람들로 빈곤율이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동시에 오악사카는 문화향유 기회로 가득하다. 많은 도서관, 박물관과 미술관, 축제가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16개 이상의 원주민 언어 집단이 존재하는 풍부한 원주민 전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원주민 전통 조리법이 관광용의 보존된 유산이 아니라 일상에서 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이곳이 아니면 없는 것들이 참 많다.

친구가 된 이웃들이 '당신은 이미 오아하께뇨스(Oaxaqueños)'라고 친밀감을 강조한다. 오악사카 사람들은 흔히 "우리는 오악사카 사람들이다(Somos Oaxaqueños)"라고 오악사카 출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곤 한다. 아내는 오악사카에서의 생활과 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오아하께뇨스'가 되어야 보이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오악사카에는 국가 법률보다 우선하는 공동체의 규약이 있다. '우소스 이 코스툼브레스(usos y costumbres)'이다. '관습과 전통'이라는 뜻이지만 원주민 공동체의 관습에 따른 자치 제도로 공동체에 적용되고 있는 규범 체계다. 실제로 멕시코 헌법은 오악사카 원주민 공동체의 '우소스 이 코스툼브레스'를 관습법적 자치권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오악사카의 수백 개 마을은 국가 법률 대신 '우소스 이 코스툼브레스'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테키오(tequio : 공동체를 위한 무보수 공동 노동)을 의무화한다.

이 '테키오'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 무상 봉사다. 참여하지 않으면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 배제나 의사 결정권 제한 등의 불이익을 받는다. 도로 수리, 축제 준비, 공공시설 유지 등에 테키오가 적용된다.

그 공동체의 지도자는 선거가 아니라 공동체 회의에서 토론하고 합의를 통해 정한다. 지도자 자격은 공동체 내부의 봉사 경력과 평판이 핵심이다. 테키오는 공동체적 신뢰와 헌신을 증명하는 방법이며 최소 10~15년간 봉사와 공동 노동을 수행한 사람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공동체의 경제적 기반인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적 공동 토지와 자원을 관리하는 공동체 토지 위원회 위원과 마을의 촌장이 선거 없이 뽑힌다. 이들 또한 급여를 받지 않고 최소한의 생계 보조금만 제공되는 명예직 성격이다. 지도자의 가정이나 농사일은 공동체가 도와주는 방식으로 보상하기도 한다.

이 테키오는 내가 50~60여 년 전 마을의 경조사에서 의무를 분담하고 폭우로 도로가 유실되면 버스가 지나도록 했던 경험과 맞닿아 있다. 당시 집마다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도로를 복구하는 등 공동체 일을 나누어 맡았다.

지도자는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조화와 전통을 지키는 봉사자라야 하는 기준이 이곳 오악사카에서 여전히 보편적이라는 것에 감동했다.
▲ 오악사카 그래픽 예술 연구소 도서관. 지역 주민·학생·관광객·연구자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어, 오악사카뿐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그래픽 아트 관련 도서·자료 컬렉션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 이안수
기부 문화의 뿌리가 된 프란시스코 톨레도

오악사카는 인구 규모에 비해 도서관 밀도가 매우 높은 '책의 도시'로 불릴 만큼 흥미로운 도서관 문화가 있다. 이 역할을 하는 중요한 도서관들이 예술가나 개인 기부자에 의해 설립되고 커뮤니티 회원들의 후원으로 유지된다. 일부 박물관 또한 그렇다.

오악사카 출신 세계적 예술가 프란시스코 톨레도(Francisco Toledo)는 자신의 재산과 장서를 기부해 여러 문화·예술 기관을 설립했다.

판화, 드로잉, 사진, 비디오, 음향 자료 등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그래픽 아트 컬렉션과 예술 서적을 보유한, 예술 도서관인 '오악사카 그래픽 예술 연구소 도서관(IAGO : Biblioteca del Instituto de Artes Gráficas de Oaxaca)'은 1988년, 프란시스코 톨레도가 수십 년간 수집한 약 12만 5천 점 이상의 컬렉션과 장서를 기부해 설립한 다음,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2015년, IAGO의 전체 컬렉션을 멕시코 문화부 산하의 국립미술원 및 문학원에 1페소에 양도하여 보존과 관리를 국가에 위임해 공공 자산화함으로써 영원히 공공의 것이 되도록 했다.

사진과 시각예술 전문 연구 도서관인 '마누엘 알바레스 브라보 사진센터 도서관' 또한 그가 설립해 공공화했다.

프란시스코 톨레도는 1970년대 이전, 오악사카시에 예술가는 많았지만 연구 도서관이 거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예술가에게는 책과 아카이브가 필요하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도서관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부와 기증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우표 전문 박물관인 '오악사카 우표박물관 내에는 필라텔리아(Filatelia 우표 수집학)와 우편 역사에 특화된 전문 도서관, '호세 로렌소 코시오 도서관'이 있다. 저명한 법학자이자 필라텔리스트인 호세 로렌소 코시오 이 코시오(José Lorenzo Cossío y Cosío)에 의해 설립되어 필라텔리아뿐만 아니라 예술·고고학·법학·역사·언어학·문학·화폐학 관련 자료를 포함하는 약 1만 8000권 이상의 방대한 개인 장서가 기증되어 공공 자산으로 전환되었다. 전문 연구자와 시민 등 누구나 무료로 활용 가능하다.

'안드레스 에네스트로사 도서관'은 작가·언어학자·정치인인 안드레스 에네스트로사(Andrés Henestrosa)의 인문학·역사·언어학·문학·예술 분야 중심의 장서 4만여 권의 기증으로 만들어졌다. 기증된 개인 장서를 운용하기 위해 오악사카 시정부에서는 시청 소유의 시내 중심의 역사적 건물을 내놓았다. 그 건물의 개·보수와 운영 자금은 증권·금융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인 알프레도 하프 엘루가 설립한 재단(FAHHO : Fundación Alfredo Harp Helú Oaxaca)이 맡아서 공립 도서관으로 운영한다.

2003년 개관 당시 4만 권이었던 장서는 현재 6만 권 이상으로 늘었다. 다양한 기관과 개인의 자료 기증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17~19세기 인쇄본, 원주민 언어 연구 자료, 인류학·고고학 문헌 등, 보물급 자료들이 많이 늘어나 오악사카의 문화·예술 교류 허브가 되고 있다.
▲ 프라이 프란시스코 데 부르고아 도서관(Biblioteca Fray Francisco de 멕시코의 대표적 역사 도서관으로, 약 3만 권 이상의 희귀 고서와 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 이안수
산토 도밍고 데 구스만 성당 복합 건물 내에 있는 '프라이 프란시스코 데 부르고아 도서관'은 인큐나불라(Incunabula : 1455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 이후부터 1500년까지 인쇄된 책)를 비롯해 15~19세기 희귀 고서가 약 3만 권 이상 소장된 도서관이다. '멕시코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 도서관'으로 평가되는 도서관인데, 이 책들은 1850년대 멕시코 개혁법 때 교회 재산이 국유화되면서 공공기관으로 흩어졌다. 이 책들을 1990년대 연구 도서관으로 정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는데, 알프레도 하프 엘루가 재정 지원을 맡았다.

오악사카 지역의 원주민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후안 데 코르도바 연구 도서관'도 있다. 지난 2011년 FAHHO에 의해 설립된 오악사카 시내 역사적 건물인 산 파블로 문화센터 내에 있는 연구 도서관이다.

알프레도 하프 엘루가 오악사카 지역의 역사 문헌 보존에 관심을 두게 된 건 희귀본 연구자이자 식민지 시대 문헌과 고문헌 전문가인 그의 아내, 마리아 이사벨 그라녠 포르루아(María Isabel Grañén Porrúa)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이 재단은 안드레스 에네스트로사 도서처럼 가치가 있는 곳에 자금을 지원하고 공공을 위해 돈이 들어가야 하는 일을 맡아 운영한다.

후안 데 코르도바 연구 도서관도 그렇다. 오악사카와 멕시코 원주민 세계에 대한 학술 연구와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연구도서관인데, 오악사카 원주민 세계와 멕시코의 다문화적 유산 연구를 진행한다. 원주민 언어, 역사, 인류학, 고고학, 민속학, 문학, 예술 관련 전문 자료 도서관을 운용하고 있다. 현재 약 2만 8000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초기의 핵심 자료는 FAHHO에서 수집했고 이후 학자·기관·개인들의 기증과 구매가 계속되고 있다. 오악사카 및 멕시코 내 대학·연구 기관과 협력하여 자료 공유하면서 학자, 학생, 연구자뿐만 아니라 열람실까지 일반 시민 모두에게 무료로 개방된다. 이 도서관의 이름인 '후안 데 코르도바(uan de Córdova)'는 오악사카 지역 원주민 언어(특히 사포텍어와 미스텍어)를 기록하고 문법서를 편찬한 16세기 스페인 출신 도미니코회 수도사이자 언어학자의 이름을 기려 붙였다.

이 도서관이 있는 건물은 산 파블로 문화센터(Centro Cultural San Pablo)의 일부로 오악사카의 전시, 콘서트, 강연, 워크숍, 영화 상영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개최되는 오악사카 시민들의 열린 복합 문화 허브로 역할하고 있다.

이 건물은 1529에 세워진 오악사카 최초의 수도원인 도미니코회 산 파블로 수도원(Convento de San Pablo) 이었다. 멕시코의 '개혁법'으로 수도원 기능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 건물은 훼손·분할·매각되어 오랫동안 방치됐다. 이를 FAHHO가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고 복원해 2011년 현재의 문화센터로 개관했다. 수도원이었던 역사적 흔적은 문화센터의 이름으로 남았다. 현재 FAHHO가 관리·운영 및 프로그램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기부를 통한 개인 유산의 공공화

'멕시코 루피노 타마요 선사미술관'은 오악사카 출신 화가인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가 평생 모은 선사·고전기 유물들을 고향에 기증하기 위해 1974년 설립했다. 예술적 뿌리와 영감의 원천을 고향에 돌려주려는 기부였다. 이렇듯 기부를 통한 개인 유산의 공공화는 오악사카 문화의 전통이 되었다.
▲ 멕시코 루피노 타마요 선사미술관(Museo de Arte Prehispanico de Me 멕시코의 선사·고대 문화를 예술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미술관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가 자신의 개인 컬렉션을 기증하여 설립되었다.
ⓒ 이안수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나는 언제나 낙원이 도서관 같은 곳일 거라고 상상해왔다"라고 했다.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라는 아내의 말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과도 일치한다. 전문 연구자나 일반인, 방문자의 구분 없이 언제나 무료로 접근 가능한 수많은 도서관과 미술관들만을 출입해도 오악사카에서의 낙원 체험은 유효기간의 제한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모티프원의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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