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암서 빛으로 살아난 ‘찬란한 에르미타주’
지난 5월 4일 오후 4시.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4 안 불이 꺼지자 관람객 시선이 일제히 정면으로 향했다. 잠시 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이 거대한 빛으로 되살아났다. 에르미타주 외관을 구현한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외관) 위로 꽃과 보석, 밤과 낮, 계절의 변화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순식간에 러시아 황실의 궁전으로 변하자 곳곳에서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웅장한 음악까지 더해지자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실제로 영상과 사진 촬영은 대부분 이 공간에서 이뤄졌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공식 디지털 특별전 ‘찬란한 에르미타주’ 현장이다. 지난 4월 30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서울 상암 문화비축기지에서 오는 7월 30일까지 열린다.
몰입형 영상 연출을 위해 20분 간격으로 입장하는 방식인데도 주말과 연휴에는 하루 600~700명이 찾을 정도로 분위기가 뜨겁다. 실제 현장에선 어린 자녀 손을 잡은 가족 관람객부터 연인, 외국인까지 관람층도 다양했다.
약 7분간 이어진 미디어아트가 끝나면 겨울궁전 입구가 열린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건 외부만큼이나 거대한 겨울궁전 내부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공간은 겨울궁전의 상징인 ‘요르단 계단’이다. 천장화 속 올림푸스의 신들이 실제로 내려다보는 듯하고, 흰 대리석과 금빛 장식, 거울이 이어지며 공간은 끝없이 확장된다. 영상은 “궁전은 첫 순간부터 감탄을 자아내야 한다”는 건축가 라스트렐리의 철학과 함께 엘리자베스 여제, 예카테리나 대제의 역사까지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계단을 오르면 표트르 대제홀과 문장홀로 이어진다. 이곳도 황금빛 장식과 거대한 샹들리에가 압도적이다. 특히 러시아 제국 52개 지방 문장이 새겨진 샹들리에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이어지는 1812년 전쟁 영웅들의 회랑에는 300명이 넘는 장군 초상화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빼곡하게 걸려 있다. 아직도 비어 있는 13개의 액자는 묘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가장 인상적인 공간 중 하나는 ‘라파엘 로지아 회랑’이다. 예카테리나 2세가 바티칸의 라파엘 전시장을 복제하도록 지시해 만든 공간으로, 훗날 “원본보다 더 인상적”이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마지막 성 게오르기 왕좌의 홀에 들어서면 새하얀 공간 한가운데 붉은 벨벳 왕좌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6m 높이 대리석 기둥 48개가 둘러싼 장면은 러시아 황실의 권위와 과시욕을 실감하게 만든다.

원화보다 가까이 관찰할 수 있어
T5 공간부터는 관람객이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한다. 전시장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모자상’,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앙리 마티스의 ‘춤’, 클로드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정원 속 여인’, 르누아르의 ‘배우 잔 사마리의 초상’ 등 에르미타주 대표 명작 30여점이 등장한다. 미켈란젤로의 ‘웅크린 소년’, 콕스의 ‘공작 시계’ 같은 조각 작품도 디지털로 구현됐다.
다빈치의 ‘성모자상’ 앞에서는 관람객들이 한동안 화면 가까이 다가가 세부를 들여다본다. 성모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따뜻한 표정과 손끝 묘사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르네상스 특유의 부드러운 명암 표현도 디지털 화면 위에서 살아난다. 모네의 ‘생타드레스의 정원 속 여인’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햇빛이 스며드는 정원의 공기와 색채 변화가 화면 전체에 퍼지며 인상주의 특유의 흐르는 순간감을 만든다.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작품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다. 어두운 화면 속에서 아버지가 탕자를 끌어안는 장면이 천천히 확대되자, 전시장 분위기도 자연스럽게 차분해진다. 손등의 질감과 낡은 옷자락, 얼굴 위에 드리운 빛까지 세밀하게 드러난다. 한쪽에선 작품 설명을 읽으며 오래 머무는 관람객들도 적지 않았다.
마티스의 ‘춤’이 등장하는 순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원형으로 손을 맞잡고 춤추는 다섯 인물이 거대한 화면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 펼쳐지자 공간 전체가 단숨에 밝아진다. 강렬한 붉은색과 푸른 배경, 초록의 땅이 부딪히며 화면 전체에 원초적 에너지가 흐른다. 관람객들 사이에선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이다”라는 반응도 나왔다.
이번 전시에서 인상적인 점은 디지털 구현 수준이다. “실물이 아니라 감동이 덜하지 않을까” 했던 우려는 전시장 안에서 금세 사라진다. 항공우주 산업에 활용되는 초정밀 스캐닝 기술 덕분에 붓 터치와 캔버스 질감, 오래된 물감의 갈라진 틈까지 눈앞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이날 미술관을 찾은 한 방문객은 “실제 미술관에서는 작품 보호를 위해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서는 원화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 구석구석 관찰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림 속 물감이 살아 있는 느낌”이라는 관람객 반응도 나왔다.
관람 시간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빠르게 둘러보면 1시간 남짓이지만, 작품 설명과 영상 연출까지 모두 따라가며 감상하면 몇 시간도 머물 수 있다. 현장에서도 어린 자녀와 함께 온 가족 관람객들은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며 설명을 읽었고, 연인들은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느라 분주했다. 외국인 관람객들도 적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명화를 크게 틀어놓은 디지털쇼와는 달랐다. 상암의 거대한 탱크 안에 겨울궁전 공간 자체를 옮겨놓으려는 시도에 가깝다. 관람객은 그림을 보는 동시에 황제들의 계단을 오르고, 무도회장을 지나며, 제국의 기억 속을 걷는다. 실물이 아닌데도, 오히려 더 가까워진 경험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9호(2026.05.13~05.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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