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하기 어려울 때 내가 꺼내 보는 말
[김혜영 기자]
|
|
| ▲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Do We Still Love Life |
| ⓒ 김영사 |
20대에는 이런 질문이 낯설었다. 내 삶은 언제나 다양하고 새로운 사건들로 가득했고 그 일들을 대하는 나도 펄떡 펄떡 뛰는 물고기 같았으니까. 순간에 집중하여 그것들을 겪어내기에도 바쁜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작은 독립서점에서 발견한 이 책이 내 맘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그러게 나 삶을 사랑하는 걸까? 여전히 그런 걸까?
지금의 삶이 20대에 비하면 분명히 안정된 것 같아 보인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을 덜커덩 거리며 질주하던 연애도 한 사람과 안정적 크루즈 모드로 변경되었다. 새로운 것이나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도 예전보다 훨씬 내 색깔을 선명히 하며 접근한다. 그래서 싫을 땐 적당히 피해가고 좋을 땐 한 발 먼저 나서 쟁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삶이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들은 종종 있다. 깊게 믿었던 사람들의 낯선 얼굴을 볼 때, 애써 해 놓은 일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물결을 일으킬 때, 앞으로의 남은 시간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소유냐 존재냐>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진 에리히 프롬의 미발표 유작 원고를 묶어 만든 이 책은 프롬의 마지막 8년을 함께한 조교인 라이너 풍크가 묶었다. 여러 주제로 된 짧은 글들의 모음인데 그 중 첫 번째 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프롬은 삶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손쉽게 삶은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프롬은 삶의 특수성을 통해서 삶을 더 깊게 설명한다.
삶이란 항상 하나가 되고 완전해 지려는 성향이 있다.
거꾸로 보면 삶은 언제나 하나가 아니고 완전해지기 전의 상태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성장과 변화를 겪고 있다. 그 성장은 제멋대로가 아닌 각 생명체의 형식과 구조를 따른다. 예를 들면 사과나무는 절대 벚나무가 될 수 없지만 타고난 체질과 주변 환경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건강한, 병든, 키 큰, 키 작은 등)의 사과나무로 자랄 수 있다.
이렇듯 가지고 있던 구조와 태어난 환경이 끝없이 상호작용을 주고받으며 겪는 변화와 발전의 과정이 삶이다. 불교식으로 보자면 인연(因緣)이다. 인(因)은 씨앗이고 연(緣)은 밭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인과 연이 만나 어떤 과정을 겪을지는 알 수 없기에 프롬은 삶은 과정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삶은 과정이다.
이렇듯 삶은 주어진 씨앗에서 시작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무생명의 영역과 비교하자면 무질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수많은 구조와 다양한 환경의 조합이니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삶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삶을 지배하려는 강박적 통제 욕구에 사로잡힌 사람은 원하는 대로 삶을 완성하고 싶어한다. 그런 일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니 그는 타인의 삶도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사랑할 수가 없다. 프롬은 사랑이란 무언가를 정의하며 그 이야기를 보충한다.
삶을 사랑하건, 다른 사람이나 동물, 꽃을 사랑하건
모든 종류의 사랑에 적용되는 원칙이 있다.
내 사랑이 적절하고 상대의 욕망과 본성에 맞을 때만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적은 물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라면 그 식물에 대한 사랑은
필요한 만큼만 물을 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식물에 무엇이 좋은지'에 관련된 선입견이 있다면,
가령 최대한 물을 많이 주는 것이 모든 식물에 좋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식물을 해칠 것이고 죽일 것이다.
나에게는 식물이 사랑 받아야 할 방식대로
식물을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생명체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상이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고 무엇이 상대에게 최선인지 정한 내 선입견과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랑은 파괴적이기까지 하다고 프롬은 강조한다. 그러니 삶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타인의 것이든 자신의 것이든) 삶을 내 기준대로 통제하려 한다면 그건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통제가 강화되면 결국 폭력행사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상대를 신체적으로 위협하는 것 뿐 아니라 여린 마음이나 무지를 이용해 속이고 기만하거나 조종하려는 방식까지 포함한다. 사랑과는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폭력과 사랑 둘 다 현실을 대처하고 현실을 감당하는 기본 방법이지만 그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폭력을 행하는 사람과 사랑을 하는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력에 효과 있다는 이유로 폭력수단(재산, 지위, 명성, 탱크와 폭탄)의 크기를 키우는 데에만 집중하고 이를 자기 인성의 크기로 착각한다. 그리고 실제 자기 자신(자신의 정신, 사랑, 생명력)을 키우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다. 결국 자기 자신은 더욱 약해진다.
반면 사랑하는 사람은 쉬지 않고 자신을 변화 시킨다. 사랑은 이해하고 설득하며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애쓰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더 많이 느끼고 관찰하며 자기 자신과 더욱 가까워져야한다. 이 과정은 인내와 용기를 전제로 한다. 실망을 참고 견딜 용기, 일이 잘못되어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겠다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은 점차 강해진다.
그렇다면 결국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짧은 말로 명확히 정리하긴 어렵다. 하지만 누군가에 대해 '그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다고 프롬은 설명한다. 그 말이 성장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가졌던, 그 기분 좋은 따뜻함을 기억하기에 프롬의 말에 무척 공감하였다. 또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사회는 자꾸 삶을 사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내몬다. 겉모습과 형식에 집중한 나머지 어떤 행사(결혼식, 장례식, 전시회 등등)에 갔을 때 행사에 어떤 것이 잘 어울리는지 느끼기보다는 생각하게 만들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문화를 퍼트리고, 존재가 아닌 행동, 소유, 사용에 집중하기 쉽게 조정한다.
그래서 프롬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려면, 여전히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적고 있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첫걸음을 뗀 셈이다.
첫 걸음을 뗀 후엔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 질문에 맞는 의미 있는 해답을
이런저런 책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답은 자기 안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삶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았다. 정말 삶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 통제 내지 폭력을 일삼고 있던 것은 아닌지. 이제부터 프롬의 말처럼 내 안을 들여다보며 삶을 여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매일 성장하고 인내하고 변화해 나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래서 내 삶을 다시 돌아보는 날이 오면,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익산역 앞 원도심에서 저녁마다 벌어지는 일...모두 놀랍니다
- 내란우두머리 2심 첫 공판 파행... 윤석열 불출석에 김용현·노상원 줄줄이 퇴정
- '국민배당금제'가 사회주의라는 궤변
- 한강변에 파리 센강보다 큰 수영장 가능하다...새로운 시대의 개막
- 일터 복귀한 61세 반장들 "AI가 못하는 일이 있다"
- 보건실 가는 게 '특혜'라는 학생들... 지금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
- 또 1등... 부산 북구갑, 하정우는 왜 계속 앞서갈까
- 첫날 후보 등록 김부겸-추경호... "절박감에 응답"-"이재명 정권 폭주 막겠다"
- [오마이뉴스·STI 예측] 경남 김경수 44.1% - 박완수 40.1%
- 위험천만 컴퓨터실 교사가 치우겠다는데 '안 된다'는 학교...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