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트렌드 2026]손바닥 위에서 펼쳐지는 ‘운(運)의 시장’

2026. 5. 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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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일상으로 퍼지는 '운세 문화'
사주·연애…디지털 세대 새로운 언어
일시적 유행 넘어 새 시장 매개 역할

2026년 봄, 해발 629m 관악산 연주대(戀主臺). 절벽 위 응진전(應眞殿) 안에서는 두 손을 모은 청년들이 절을 올린다. 좁은 법당이 가득 차 주말이면 들어가지도 못한 사람들이 문밖에 서서 합장을 한다. 바위틈마다 누군가 끼워 놓은 동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등산로 곳곳에는 손바닥만 한 돌 조각을 올려 쌓은 돌탑이 줄줄이 솟아 있다. 정상 비석 앞은 더 진풍경이다. 가벼운 백팩에 크로스백을 멘 20~30대들이 인증샷을 위해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선다. 지난 1월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역술가 박성준씨가 "운이 안 풀리면 관악산 연주대에 가라. 같은 소원을 세 번 빌면 들어준다"는 한마디가 변화의 계기였다.

'개운(開運) 산행'은 단순한 등산이 아니다. 운을 트이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산을 오르는 행위로, 최근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새로운 휴일 루틴으로 떠올랐다. 사주·타로 같은 운세 문화가 Z세대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트렌드모니터 조사에 따르면 "사주나 타로에 관심이 있다"고 답한 비율은 20대 68.0%, 30대 67.5%에 달한다. 비과학적이라 비판받아 온 운세가 오히려 가장 디지털 친화적인 세대에게서 새로운 언어로 재해석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운세의 무대가 '애플리케이션(앱)'을 넘어 '인공지능(AI)'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2026년 1월 챗GPT 스토어 라이프스타일 부문에서 운세 관련 GPT는 상위권을 차지했다. 이름과 생년월일만 입력하면 10초 만에 성격·재물운·이동운 분석이 쏟아진다. 금융권도 빠르게 합류했다. KB국민은행은 KB스타뱅킹 안에 신년운세부터 속마음 타로까지 10여종의 무료 운세 서비스를 탑재했고, 신한라이프 역시 토정비결·궁합 콘텐츠를 운영한다. 사주 앱 '포스텔러'의 월간 활성 이용자 수는 62만8000여명으로 전년 대비 28% 증가했다. 운세는 더 이상 '점집'이 아닌, 출퇴근길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운세는 연애 시장의 문법도 다시 쓰고 있다. 글로벌 데이팅 플랫폼 틴더(Tinder)가 지난달 공개한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 이용자의 프로필 내 '사주' 언급은 전년 대비 약 4배 증가했다. '궁합' '운명' '별자리'는 약 3배, '타로'는 2배 이상 늘었다. 틴더가 시범 도입한 '별자리 모드'는 여성 이용자의 '좋아요'를 약 20% 끌어올렸다. 5월에는 건국대·경희대·한양대 등에서 '별자리 모드 체험존'을 운영하며 점성술·사주 크리에이터와 협업한 오프라인 이벤트로 접점을 넓힐 계획이다. MBTI가 지나간 자리에 사주와 별자리가 들어선 셈이다.

주목할 점은 화면을 넘어 '몸으로 경험하는' 운세 콘텐츠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의 '개운 산행' 관련 게시물은 32만건을 넘어섰고, 같은 기간 '등산복' 거래액은 138%, '애슬레저' 거래액은 286% 증가했다. 서울관광재단에 따르면 2026년 2월 관악산 센터 방문객은 5217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9.6% 늘었다. 행운 굿즈 시장도 동반 성장하고 있다. 카카오톡 선물하기 내 '액막이 명태' 관련 상품 수는 약 39% 증가했고, '행운 아이템'을 소지한 경험은 10대 49.5%, 20대 40.5%에 달했다. 직접 산을 오르고, 부적을 만지고, 타로 카드를 뽑는 '오감의 운세'는 Z세대에게 일종의 자기 돌봄(self-care)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강력한 원인은 '미래에 대한 만성적 불안'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의 '2026년 고용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15~29세 청년 취업자는 21만3000명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취업·자산·인간관계 모두 불안한 상황에서 운세는 저렴하고 즉시 접근 가능한 '마음의 안전핀'으로 작동한다. 두 번째는 '나를 더 깊이 알고 싶은 욕구'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 조사에서 1020세대의 43%는 자신의 성향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운세를 본다고 답했다. MBTI보다 구체적이고 서사적으로 자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세 번째는 '경험의 회복'이다. 알고리즘이 24시간 비교와 자극을 쏟아내는 환경에서 두 다리로 산을 오르고 손으로 카드를 뽑는 행위는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감각'을 제공한다.

운세 시장은 더 이상 주변부 문화가 아니다. 타로 민간자격증 발급기관이 2년 만에 65곳에서 105곳으로 늘었고, 챗GPT 스토어부터 데이팅 앱, 금융권 슈퍼앱까지 앞다투어 운세를 핵심 콘텐츠로 끌어안고 있다. 일시적 유행을 넘어 자기 이해·감정 관리·관계 탐색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 카테고리'로 진화하고 있다. 이는 기업에 새로운 시장 기회이자 동시에 새로운 소비자 언어를 의미한다. 운세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이용자의 '기분(feel)'을 읽어내는 데이터이자, 디지털 서비스와 오프라인 경험, 커머스를 연결하는 매개로 작동할 것이다. 운세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운세에 머무는 것'이 일상이 된 시대, Z세대의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는 이 시장이 어디까지 확장될지 그 흐름을 읽어내는 일이 다음 트렌드를 이해하는 단서가 될 것이다.

최지혜 트렌드코리아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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