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용원 교수의 신학하는 마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절망으로 봉인하지 않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는 같은 사물도 다르게 보입니다. 작은 불빛 하나가 켜지면 방의 윤곽이 살아나고 길의 방향이 보이며 방금 전까지 두려움이던 그림자도 제 자리를 찾지요. 사람의 삶도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늘 중간 장면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마치 끝을 다 본 사람처럼 서둘러 판단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대개 아직 제대로 비추어지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독일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2014)에게도 그런 빛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그가 열여섯 나이로 독일군에 징집되기 불과 한 달 남짓 전인 1945년 1월 6일,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자신을 둘러싸고 꿰뚫는 기이한 빛에 사로잡혔습니다. 훗날 그는 이 일을 “큰 빛의 환영적 경험”으로 회고했습니다. 그 자신은 당시 알지 못했지만 그날은 예수의 현현(Epiphany)을 기리는 주현절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그 빛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빛의 뜻을 묻는 일이 그의 평생이 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그의 신학은 너무 이르게 찾아온 빛을 그리스도의 미래 안에서 다시 읽어 간 긴 해석의 생애였는지도 모릅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을 역사 바깥의 추상 원리로도 인간 내면의 종교 감정으로도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시간과 무관한 차가운 개념이 아니라 역사의 길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셨지요. 계시는 역사를 벗어난 별도의 비밀이 아니라 역사 전체가 마침내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기 증언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시가 역사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히 이해된다고 봅니다. 훗날 그는 “세계와 역사의 목표는 그 시작보다 하나님께 더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계의 맨 앞에 놓인 ‘처음의 원인’만이 아니라 역사의 맨 끝에서 모든 것의 참뜻을 밝히시는 ‘마지막의 진실’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판넨베르크에게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누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이 오늘을 비추는 자리였지요. 끝이 앞을 다시 읽게 하고 미래가 현재를 해석하게 한다는 것. 젊은 날 실패처럼 보였던 일이 훗날 뜻밖의 훈련이었음을 깨닫는 때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래 견딘 상처가 어느 날 타인의 눈물을 알아보는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중간 장면만 붙들고 인생 전체를 판정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빗나가는지를.
그의 신학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판넨베르크에게 부활은 죽은 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의 운명 안에서 “모든 사건의 끝이 선취되어 일어났다”고 보았습니다. 마지막 날의 빛이 이르게 그러나 더없이 분명하게 역사 안으로 새어 들어온 사건이 부활이었지요. 그러니 부활은 예수님의 ‘이후’만이 아니라 그분의 ‘이전’까지 다시 읽게 합니다. 십자가의 어둠도 제자들의 무너짐도 세상의 조롱과 실패까지도 부활의 빛 아래서 새로운 뜻을 얻었지요.
오랜 세월 후에 그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예수께서 오심으로 생명의 빛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에게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영광의 빛이 “우리가 각성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춰준다”고 했지요. 그 대목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의 한 구절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이 떠올랐습니다. 파란 여름과 하얀 겨울을 선물처럼 떠올리게 하는 그 노래처럼 빛은 마음의 색을 바꿉니다. 계절만이 아니라 시간의 의미도 바꾸어 놓는 빛. 하지만 판넨베르크가 말한 마음의 빛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비쳐 오는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이른 단정의 시대를 삽니다. 한 번의 실패로 한 사람의 삶을 규정하고 잠시의 침체로 한 공동체의 미래를 닫아 버리지요. 눈앞의 손실과 불안만으로 오늘을 해석하고 현재의 어둠을 마지막 문장처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재를 무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현재를 최종 판결인 양 대하지도 않습니다. 끝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빛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점은 고통의 자리에서 더욱 절실합니다. 상처를 당하거나 실패라도 하면 삶은 초라해지고 일은 무의미하며 존재마저 무가치하고 덧없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판넨베르크는 고통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마지막 단어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눈물이 흘러도 영원할 수는 없고 상처가 깊어도 궁극적일 수는 없으니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마지막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계를 섣불리 절망으로 봉인하지 않는 훈련이어야 합니다.
판넨베르크의 신학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끝에서 오늘을 비추시는 분. 그래서 신앙인은 아직 다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조급하게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 빛은 오늘의 파편들 속에서도 우리를 섣부르게 절망하게 하지 않으니까요. 아직 이 땅에는 이해되지 않는 장면과 쉽게 해석되지 않는 밤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장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차가운 운명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시는 하나님의 미래입니다. 끝의 전모를 아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지만 끝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견디게 하고 내일을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그 빛이 있다면 말입니다.

(장로회신학대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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