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환의 도시의 맛] 연결의 시대, 건축과 여행하는 법

2026. 5. 14. 00:1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영환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장·건축학부 교수

SNS에는 꼭 가봐야 할 건축 목록이 넘쳐난다. 새로 문을 연 미술관과 세계적인 건축가의 대표작, 어느 도시의 골목 끝에 숨은 작은 공간까지 끊임없이 공유된다. 그곳에 가면 어디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어느 시간대의 빛이 가장 아름다운지 미리 학습한다. 우리는 실제 공간을 경험하기 전에 이미지로 먼저 건축을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기록 남기기 바빴던 건축 답사
건축 수집 행위와 다를 바 없어
속도 늦추니 공간이 달리 보여
핸드폰 내려놓고 건축 음미를

나의 젊은 시절 건축 여행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건축물을 보느냐였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도시에서의 동선을 미리 정리하고, 건물에 도착하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건물의 외형과 그 안의 공간은 물론이고 창틀의 접합부와 경첩의 디테일까지 가능한 한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오면 내게 남는 것은 수백장의 사진이었다.

당시엔 그것이 건축가다운 여행이라고 믿었다. 좋은 건축을 직접 보고, 분석하고, 가능한 한 많은 것을 기록하는 일. 건축가의 여행은 흔히 ‘답사(踏査)’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현장을 직접 밟고 조사한다는 뜻 그대로, 건축 답사는 분석과 기록의 행위에 가깝다.

여행의 의미 각성하게 해준 루이스 칸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기록했던 공간들의 기억이 언제부터인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수많은 사진과 자료가 남아 있는데도 막상 떠오르는 것은 건물의 형태와 건축가의 이름뿐이었다. 건축을 이해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 어느 순간부터 건축을 수집하는 행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답사가 다시 여행으로 바뀐 것은 10여 년 전 여름, 루이스 칸(1901~1974)의 건축을 따라 떠난 여정이었다. 그는 20세기 미국 건축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빛과 침묵, 공간의 질서를 통해 건축의 본질을 탐구했던 건축가였다.

이전까지의 여행이 가능한 한 많은 건축물을 보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해의 여행은 처음으로 ‘한 건축가의 시간을 따라가는 여행’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트렌턴·뉴헤이븐을 거쳐 뉴햄프셔의 엑스터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나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건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국 건축가 루이스 칸이 설계한 건축물들. 브린모어대학의 에드먼 홀 기숙사. [사진 임영환]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시간이었다. 브린모어대학 기숙사인 에드먼 홀 앞 잔디밭에 앉아 한참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현대 도서관 건축을 대표하는 필립스 엑스터 도서관에서는 실제 이용자들 사이에 섞여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여행 일정을 정리하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좋았다.

엑스터 도서관의 중앙 아트리움. [사진 임영환]

뉴저지주 트렌턴 근교의 작은 수영장(Trenton Bath House)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던 어느 오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건축을 보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왔는데, 이 동네 아이들에게 이곳은 그저 일요일 오후 수영을 하고 샤워를 하는 평범한 공간이구나. 나에게는 순례의 대상인 루이스 칸의 건축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루의 시간이 흘러가는 배경 같은 공간이었다.

트렌턴 근교의 배스하우스 수영장. [사진 임영환]

속도를 늦추니 이전 같았으면 스쳐 지나갔을 순간들이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멕시코시티에서 경험한 루이스 바라간(1902~1988)의 집 역시 그랬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현대 건축가인 그는 1948년 이 집을 짓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이곳에서 홀로 살았다. 현대 건축이 기능과 형태의 논리에 집중하던 시대에, 바라간은 강렬한 색채와 빛, 그림자를 통해 감정과 기억을 불러내는 독특한 공간 경험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바라간하우스는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20세기 건축의 가장 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고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평범한 주택가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바로 앞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높은 회벽과 닫힌 입면 때문에 무심히 지나칠 법한 그 집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곳에서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집안을 거닐며 바라간의 시선을 따라가 보려 했다. 격자 프레임의 창 사이로 들어온 따뜻한 햇볕이 공간의 어디까지 닿고 어디에서 멈추는지, 왜 이 침묵 같은 공간이 이상하게 편안한지. 그의 건축을 이미지가 아니라 내 몸의 온 감각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SNS 인증이 목적인 여행
현대 건축은 현실의 공간인 동시에 화면 속 이미지로도 존재한다. 다만 문제는 이미지가 경험을 대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성당과 미술관, 광장과 랜드마크를 방문하고 그 앞에서 사진을 남긴다. 건축은 머무는 공간이라기보다 촬영을 위한 배경처럼 소비되고, 여행은 체험이라기보다 인증의 과정에 가까워지고 있다.

예전의 여행은 우리에게 잠시 허락된 단절의 시간이었다. 낯선 도시를 걸으며 마주하는 생경한 감각은 익숙한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 속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여행지에서도 늘 접속된 상태로 건축과 마주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순간마저 누군가와 공유할 장면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좋은 건축은 오래 머물수록 조금씩 드러나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건축 여행은 ‘보는 여행’이 아니라 ‘머무는 여행’일 때 더욱 그 가치가 살아난다. 눈으로 확인하는 대신 몸으로 느끼고,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의 표정을 천천히 음미한다면, 건축은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몸에 남는 감각이 된다.

한장의 사진은 누군가에게 여행을 꿈꾸게 만들기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를 상상하게도 한다. 하지만 한번쯤 핸드폰을 내려놓고 건축과 함께 천천히 여행해보면 어떨까.

임영환 홍익대 건축도시대학원장 건축학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