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광의 세계는 첩보전쟁] ‘이름 없는 별’, 국가가 블랙 요원을 기억하는 방법

2026. 5. 13.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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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지난달 멕시코 치와와주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미국 정보 요원 두 명이 사망했다. 사건 초기 미국은 이들의 신원과 활동 목적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았지만, 이후 이들이 CIA와 연관된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멕시코 정부는 이들이 자국 내 공식 작전에 참여할 권한이 없었다고 밝혔고, 이 중 한 명은 관광객 신분으로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다. 존재했지만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외교 문제와 주권 논란으로 이어졌지만, 개인으로서의 삶과 희생은 철저히 익명 속에 남겨졌다.

「 정보 활동에 필수적인 익명성
조직 위해 요원 지울 때도 작동
국가마다 요원 추모 방식 달라
이름 가리고 별 달아 기록 남겨

비슷한 시기, 이스라엘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정보 요원 공개가 이루어졌다. 전몰자 추모 기간 중 모사드 수장 바르네아가 비밀 작전 중 사망한 요원을 ‘M’이라는 암호명으로 언급했다. 바르네아는 M을 이란 관련 정보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M의 이름과 구체적 임무는 끝내 공개되지 않았어도 존재와 공로만은 분명히 인정됐다.

미 CIA의 존재 지우기 훈련

지난해 11월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을 방문했을 때 ‘이름없는 별’ 21개가 보였다. [중앙포토]

평일 점심시간 붐비는 식당에 CIA 교육생이 들어간다. 교육생은 식당 주인과 종업원의 시선에 걸리지 않은 채 5분을 버텨야 한다. 물 한잔이라도 받아들면 실패다. 주변 환경 속에 완벽히 녹아들어 존재를 지우는 ‘그레이 맨(Gray Man)’ 훈련이다. 1930년대 초반 중국 국민당의 비밀조직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가 ‘남의사(藍衣社)’로 불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남색 옷을 입은 요원들은 남색 옷을 즐겨 입는 군중 속에 자신을 은폐했고, 흔적마저 감췄다.

정보 요원은 존재를 희미하게 만드는 삶을 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평범해져야 했고, 자신을 지워야 했다.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 본인은 물론 가족과 협력자까지 위험에 노출된다. 정보활동 자체도 무력화된다. 어떤 경우에는 익명성이 국가 간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가 된다. 존재를 감추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보조직이 익명성을 생존 방식으로 삼아온 이유다.

익명성은 정보 요원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국가가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이기도 하다. 보호를 위해 숨겨진 이름은 때론 바로 그 이유로 가장 먼저 지워진다.

1990년대 중반, A국에서 ‘블랙’으로 활동하던 정보 요원 B가 실종됐다. 조직은 가족들에게 그의 실종이 개인 부주의와 여자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사업 명목으로 지급된 자금을 탕진했고, 결국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취지였다.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확인할 방법도 없던 가족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블랙으로 활동하던 요원의 존재는 애초부터 인정될 수 없었다.

장례 절차가 논의되던 즈음 B가 실종 8개월 만에 갑자기 A국에 모습을 나타냈다. 사무실에서 권총을 든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그의 몸에는 처절했던 저항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머리와 얼굴에는 함몰과 봉합 자국이 뚜렷했고 갈비뼈와 어깨 역시 손상된 상태였다. 그는 북한에서 한 달 가까이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의 몸이 명백한 증거였다.

북한만 아는 블랙 요원 석방 셈법

2018년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별은 18개였다. [중앙포토]

B는 서울로 귀환했으나 바로 집에 갈 수 없었다. 여러 기관을 옮겨 다니며 두 달 가까운 조사를 받았다. 몸에 남은 상처가 모든 의문을 설명해주진 못했다. 특히 북한이 왜 그를 돌려보냈는지 누구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B 자신도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조사기관을 전전할 때마다 그는 북한에서처럼 눈을 가려야 했다. 그는 자신을 증명할 수도, 보호받을 수도 없는 위치에 남겨졌다. B는 직을 떠나야 했고, 사건은 ‘미인계에 의한 역용 공작’으로 퍼져나갔다. 소속은 달라도 북한을 상대하는 관점에서 필자와 대화가 많았던 B는 이런 말을 했다. “내 주변 사람들의 인적 사항은 북한 정권이 존재하는 한 북한 정보 기관의 파일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가족과 부모 형제 누구도 지켜주지 못했다.” B는 살아 돌아왔지만, 주변이 원망스러웠고 죽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군중 속에 자신을 숨기던 그레이 맨은 결국 남북 모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회색의 인간으로 남게 되었다. 북한이 그를 돌려보낸 목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느님도 모르는 게 공작이다. 조사관은 조사자의 입장에서, B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이 글을 읽고 있을, B를 납치했던 북한의 그 공작관.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공작이다.

멕시코에서 사망한 CIA 요원들, 바르네아가 언급한 모사드 요원 M, 살아 돌아왔지만, 옷을 벗어야 했던 B. 그들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숨겼지만, 그 숨김 속에서 존재를 증명했다. 어떤 이는 이름 없는 별로, 어떤 이는 온전한 이해를 받지 못한 삶으로 기억됐다. 익명성은 누군가를 지켜주지만, 때론 그 존재를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문제는 얼마나 숨기고 얼마나 공개하느냐에 있지 않다. 이름을 감춘 채 살아가도록 요구한 국가가 그 존재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에 있다. 정보활동에서 익명성은 불가피한 조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을 지웠다고 국가의 책임마저 함께 사라져선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는가

2021년 문 전 대통령이 찾았을 땐 19개로 늘었다. [중앙포토]

국가마다 익명성을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CIA 본부 추모의 벽에는 사라진 요원들이 이름 대신 별로 남겨진다. 기록은 남기되 이름은 드러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영화와 소설, 국가적 서사 속에서 정보활동을 이야기로 남겨왔다. 모사드는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모사드를 신화로 만든다. 바르네아가 M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도 그런 기억 방식의 연장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침묵과 비공개 방식에 머물러 왔다. 정보 요원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데 훨씬 신중했다.

최근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이름 없는 별 달기 운동’은 그런 침묵 속에서 등장한 또 다른 기억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기억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결국 그 사회가 인간의 존엄과 국가의 책임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며칠 전 B로부터 짧은 연락이 왔다. “이름 없는 별, 잘 받았습니다.”

장석광 국가정보연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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