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칠판을 캔버스로… 오래된 사진 같은 그림들

손영옥 2026. 5. 1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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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문화]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갖는 김명희 작가의 신작 ‘김치 담그는 날’(2025). 2000년 제작 동명의 작품과 달리 부엌 소품으로 지구의가 있고, 창으로 표현한 영상에는 해외 여행길 비오는 차창 밖 풍경이 흐른다. 갤러리현대 제공


1990년 미국 뉴욕 소호 생활을 접고 귀국한 김명희(77) 작가는 같은 서양화가인 남편 김차섭(1940~2022)과 함께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내평리 폐교를 구입해 리모델링해서 살았다. 10년 이상 문 닫은 교실에 버려진 칠판을 캔버스 삼아 오일 파스텔로 그리기 시작한 ‘칠판 그림’은 이후 그의 시그니처가 됐다. 또 칠판 그림 중 2000년에 제작한 ‘김치 담그는 날’은 처음으로 칠판 한 켠에 비디오 영상을 창문처럼 설치했고, 회화와 영상을 결합하는 장르적 실험으로 주목받았다.

그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깊은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지난 7일 시작했다. 이 갤러리 개인전은 2000년과 2012년에 이어 세 번째인데, 1980년대 초기작과 칠판 그림의 변천사를 볼 수 있게끔 신작을 포함한 40여점이 나왔다.

2000년 작 ‘김치 담그는 날’은 부엌에서 배추, 파, 양파, 고추 등 김치 재료를 늘어놓고 손질하는 중년 여성을 그렸다. 부엌 창에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의 영상이 나온다. ‘위대해질 기회’ 없이 가족을 위해 반복적인 일상을 사는 현재의 삶에서 어떤 출구를 찾고자 하는 주부의 내면이 읽혔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신작 ‘김치 담그는 날’(2025)은 얼핏 같아 보이는데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이번 신작에서는 부엌에 있을 법하지 않은 낯선 소품인 지구의가 등장했다. 또 영상에는 빗방울이 맺힌 차창 밖 풍경이 지나가는데, 작가가 어느 비오는 날 공항으로 가던 차 안에서 찍은 영상이다. 작가가 칠판 그림에 담은 여성 서사의 주인공은 이렇게 가치관이 시대 변화에 따라 전진한다.

작가는 개막 기자간담회에서 칠판에 회화를 그릴 때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칠판은 배경 자체가 검습니다. 마치 바로크 회화의 검은 배경 같은 효과를 냅니다. 저는 바로크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검은 화면 위에 빛을 그리는 기분이 듭니다.”

어떤 면에서는 맞고 어떤 면에서는 틀리다. 카라바조, 루벤스 같은 17세기 바로크 화가들은 드라마 같은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배경을 검게 칠하고 그 위에 성서 속에 등장하는 장면을 그렸다.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 덕분에 영화를 보는 것처럼 스펙터클하다.

작가는 어떤 색도 칠하지 않고 칠판 자체를 검은 바탕으로 쓴다. 또 유채 물감처럼 칠판에 빨려 드는 걸 막기 위해 오일 파스텔을 써서 대상을 묘사한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칠판에 분필로 그린 글씨나 그림처럼 이미지가 스며들지 않고 표면에 떠 있는 느낌을 준다.

그 결과, 김명희의 칠판 그림은 배우들이 쏙 빨려 들게 연기하는 드라마라기보다는 실제 인물들이 서툴지만 진실을 드러내는 다큐멘터리 느낌을 준다. 또 표현하는 대상은 지금이 아니라 과거의 인물처럼 희미해지는 효과를 낸다. 칠판 그림 속 소년들은 한때 그 학교에서 축구공을 차고 잠자리채를 들고 다녔을 추억의 인물처럼 다가오고, ‘김치 담그는 날’은 페미니즘 서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칠판 속 인물들은 시대의 초상, 시대의 군상이다. 과거에는 잠자리채를 든 소년이 등장했다면, 이제는 도심 분수에서 옷이 젖은 채 뛰노는 아이들이 나온다. 작가가 즐겨하는 여행 덕분에 군상이 담긴 시공간은 세계로 확장한다. 199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 때 마주한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담은 대형 인물화가 그런 예다.

김명희 작가와 2002년 작품 ‘내가 결석한 소풍날 02’. 갤러리현대 제공


작가는 1972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추상화도 해 봤지만 성정에 맞지 않았다. “추상 언어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는 1980년대 초기작에서부터 확인된다. 그는 1975년 뉴욕으로 유학을 갔고 먼저 유학 와 있던 김차섭과 결혼했다. 전업작가인 남편을 대신해 가계를 꾸리기 위해 패션 부티크를 운영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가 택했던 매체는 일과 병행하며 손쉽게 작업할 수 있는 목탄 드로잉이었다. 당시의 목탄 작업이 이번 전시에 두 점 나와 동서양 신화를 서사에 담으려 했던 시도를 볼 수 있다.

지금도 뉴욕과 춘천을 오가며 작업하는 그는 ‘디아스포라’ 대신 ‘앰뷸런트’(ambulant·걸어다닐 수 있는)라는 단어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난 삶을 사는 디아스포라가 아니라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스스로 여기저기를 이동하는 삶답게 내평리 폐교 웅덩이 주변 사계를 그린 칠판 그림 신작은 뉴욕에서 제작됐다. 6월 14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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