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범 ‘국민배당금’ 발언 파장…그 뒤엔 120조원 유례없는 세수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인공지능(AI) 시대에 기업의 수익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국민배당금’ 제도를 설계하자고 제안했다.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화두를 던지는 형태였지만 주요 반도체 기업의 이익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느냐를 두고 사회적 논의가 확산하는 국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논란이 번지자 청와대 측은 “청와대 논의와 무관한 개인 의견”이라고 선을 그었다.

김 실장이 11일 페이스북에 “AI 시대에 메모리 기업 주주, 핵심 엔지니어 등 이미 생산자산에 접근한 계층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매우 큰 수혜를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 상당수 중간층은 원화 강세에 따른 구매력 개선, 제한적 재정 이전, 일부 자산 상승 정도의 간접효과만 누릴 수 있다”고 적었다. AI 전환이 소위 ‘K자’형 양극화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어 김 실장은 “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의 결과가 아니고, 반세기에 걸쳐 전 국민이 함께 쌓아온 산업 기반 위에서 나온다”며 “일부는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실현 방안으로 국민배당금을 언급했다. 김 실장은 “초과이익의 일부를 현세대의 사회 안정성과 전환 비용 완화에 사용하는 것은 단순한 분배가 아니라 체제 유지 비용의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즉각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 재계 관계자는 “AI 반도체 산업은 수십조원 단위의 선행 투자가 지속해서 필요한 구조”라며 “초과이익 환원 논의가 자칫 기업의 투자의사 결정과 글로벌 경쟁력에 부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식시장도 요동쳤다. 12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131.17포인트(1.68%) 오른 7953.41로 출발해 장 중 한때 7999.67까지 오르며 8000을 넘봤다. 하지만 이후 5% 이상 급락했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는 “한국의 고위 정책 당국자가 AI 산업에서 발생한 세수를 활용해 국민에게 배당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 증시가 크게 출렁였다”며 “이 발언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같은 반도체 기업이 그 이익을 사회적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시장은 김 실장이 추가 해명을 내놓고 나서야 낙폭을 일부 만회했다. 김 실장은 증시 변동성이 커지자 “기업 이익에 새로운 횡재세를 부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AI 산업 호황으로 자연스럽게 늘어난 초과 세수를 활용하자는 의미”라고 부언했다.
김 실장의 국민배당금 발언의 배경엔 역대 최대일 것으로 전망되는 초과 세수가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현재 언급되는 액수보다 초과 세수 규모가 훨씬 클 것으로 예상하는 건 맞다”며 “(김 실장이) 좀 더 큰 틀의 고민을 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정부 안팎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1분기 실적이 공개된 뒤, 지난해 85조원 정도였던 전체 법인세수가 올해 120조원을 웃돌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 반도체 인력의 소득세, 주식시장 활황과 무역흑자 확대에 따른 연쇄 효과까지 고려하면 유례없는 초과 세수가 확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초과 세수는 국가재정법에 쓰임새가 정해져 있다. 정해진 비율대로 지방교부금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나눠준 뒤 공적자금상환기금 출연, 국채 상환, 추가경정예산 재원 순으로 써야 한다. 일각에서 “빚 안 갚고, 다 쓸 거란 얘기”란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런 지적을 예상한 듯 김 실장도 “초과 세수로 국가부채를 줄이자는 주장도 가능하고, 국부펀드 형태로 장기 비축하자는 주장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미리 설명했다.
국민배당금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김 실장은 노르웨이를 예로 들었다. 노르웨이는 1990년대 석유 수익을 국부펀드에 적립하고, 그 운용 수익을 사회 전체에 환원하는 구조로 설계했다. 석유를 반도체로 치환해보면 호황을 일시적 횡재로 소비하지 않고 장기적 사회 자산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재분배가 국가 재정정책에 반영돼야 한다는 게 김 실장의 시각이다.
현금 형태의 배당금을 나누자는 뜻이라기보단 재정 정책을 통해 구현하자는 취지다. 실제로 김 실장은 구체적인 재정 투입 방안으로 청년 창업 자산, 농어촌 기본소득, 예술인 지원, 노령연금 강화 등의 정책을 언급했다.
AI가 과거와 다른 형태의 양극화를 야기하는 만큼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꾸준히 나온다. AI 발전 정도에 따른 고용 충격 연구로 잘 알려진 안톤 코리넥 미 버지니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AI가 전례 없는 수준의 소득 집중을 야기할 가능성이 큰 만큼 사전적 재분배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김 실장이 글에서 AI 도구의 민주화가 자유로운 창업과 연결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한 대목은 “국민 개개인이 AI라는 생산 수단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에릭 브린욜프슨 미 스탠퍼드대 경제학과 교수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한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역시 로봇과 AI를 보유한 기업의 주식과 자본에 과세해 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비를 털어 최근까지 보편적 기본소득(UBI) 실험에 나서기도 했던 올트먼은 최근 AI 기반의 성장 이익을 공유하는 공공자산펀드(PWF) 조성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 실장이 제안한 국민배당금과도 맞닿아 있는 아이디어다.
김기승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는 “AI와 반도체의 산업 현재 성과는 오랜 기간 축적된 산업 인프라와 교육 시스템, 산업 생태계, 정부 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인 만큼 사회 환원 방식을 고민할 필요성은 있다”며 “핵심은 초과 이익을 인재 양성, 기업 경쟁력 강화, 취약계층 보호 등으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란 비판도 적지 않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기업의 초과 이익을 국가가 구조적으로 재분배하겠다는 발상은 일각에서 말하는 ‘테크노 사회주의(Techno-socialism)’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반도체·AI 산업은 대규모 선행 투자와 치열한 글로벌 경쟁이 핵심인 산업인 만큼 투자 위축이나 혁신 동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원한 한 대학교수는 “최근 정부 고위급의 발언을 보면 미래 재정 여력을 너무 낙관하는 측면이 있다”며 “아끼자는 얘기는 못 하게 하고, 쓰자는 얘기만 하는 것이야말로 편한 길로만 가려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국민배당금으로 인한 파장이 증시로까지 번지자 청와대는 수습에 나섰다. 이날 오후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 내부 논의나 검토와 무관한 (김 실장) 개인 의견”이란 입장을 밝혔다.
세종=장원석 기자, 박영우∙이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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