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에서 시작해 공연으로 끝난 참 묘한 예술

이규승 2026. 5. 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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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심지후의 연극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

[이규승 기자]

 지난 9일, 오후 1~2시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
ⓒ 이규승
1부, 집회에서...

공연은 극장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지난 9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관객은 객석이 아니라 광장으로 불려 나왔다. 누군가는 공연을 보러 왔고, 누군가는 집회에 참여하러 왔고, 또 누군가는 인근 축제를 참관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부터 이 공연의 질문은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관객인가, 시민인가."
"극장은 광장과 얼마나 멀어졌는가."
"광장에서 공연을 보는 관객은 과연 혁명적일 수 있는가."

심지후의 연극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5월9~10일, 마로니에공원 및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단순히 집회를 소재로 삼은 공연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의 극장이 광장과 완전히 분리됐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한때 극장은 광장의 기능을 수행했다. 사람들은 극장에 모여 시대의 말을 경청하고, 사회의 모순을 함께 감각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요즘의 극장은 어떤가. 무엇보다 안전해진 것은 확실하다. 무대와 객석은 분리되고, 관객은 어둠 속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는 자로 남았다. 광장은 광장대로 뜨겁고, 극장은 극장대로 닫혀 있다.

이번 작업은 바로 그 분리를 흔들기 위한 실험이다. 이와 관련해 독립 프로듀서 김남현씨는 "광장의 기능을 수행해왔던 극장이 지금은 광장과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것에 문제점을 느꼈다. 이 공연은 하나의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이라기보다, 더 근본적인 가설을 무대 위에 올려놓은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이 공연 전체를 관통한다.

"광장에서 공연을 보는 관객은 혁명적일 수 있는가?"

중요한 점은 공연을 두 시간 앞두고 열린 집회가 공연의 일부처럼 연출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회는 집회대로 준비됐다. 실제 활동가들이 참여했고, 동료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의제와 발화가 모였다. 연극은 그 집회와 극장 사이를 오가며 두 장소를 억지로 하나로 합치지 않았다. 대신 관객이 그 사이를 통과하게 했다. 집회는 무대장치도, 극장 공연을 위한 사전 이벤트도 아니었다. 집회는 그 자체로 집회였고, 그 집회를 경험한 관객들이 그대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으로 이어졌다.
 지난 9일, 오후 1~2시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광장에서 열린 집회
ⓒ 이규승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집회는 하나의 구호로 관객을 몰고 가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주체가 차례로 등장해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단어 안에 자신의 자리를 새로 적어 넣는 방식에 가까웠다.

발제는 "페미니스트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는 선언에서 출발해 성소수자의 목소리, 노동자민중의 목소리,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 장애민중의 장애이동성 문제로 이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의제 나열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추상적인 제도나 선거 절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자의 몸과 삶의 자리에서 다시 말하는 시간이었다.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는 민주주의가 성평등 없이 완성될 수 없다고 말했다. 성소수자의 존재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자를 침묵시키는 민주주의는 이미 실패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노동자민중의 발제는 민주주의가 일터와 생계, 노동의 존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빈 껍데기에 머문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는 민주주의가 국가주의와 폭력의 언어에 포획될 때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경고했다. 장애민중의 장애이동성 발제는 가장 구체적이었다. 이동할 수 없는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이라는 것과 거리와 극장과 광장의 문턱이 낮아지지 않는 한 참여는 여전히 제한된 권리라는 것을 환기했다.

이 집회는 공연의 내용을 미리 설명하는 해설장이 아니었다. 집회에서 나온 발제들이 공연의 줄거리로 곧장 옮겨가는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집회는 관객의 몸을 먼저 흔들었다. 민주주의라는 말이 누구의 입에서 발화되는지, 그 말 안에 누가 포함되고 누가 빠져 있었는지, 우리는 어떤 이름들을 아직 괄호 밖에 세워두고 있었는지를 묻게 했다. 그렇게 한 번 흔들린 관객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 무대 위 말풍선을 마주했다.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진행된 <프로파간다> 장면
ⓒ 이규승
2부, 극장에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관객은 더 이상 객석으로 안내되지 않았다. 객석의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무대를 바라보는 익숙한 관람 방식은 처음부터 흔들렸다. 관객은 무대 위로 들어섰다. 바닥은 검고 넓었고, 그 위로 수십, 수백 장의 흰 종이가 줄에 매달려 있었다. 종이들은 조명에 흔들리며 허공에 떠 있었다. 누군가의 말이었고, 누군가의 고백이었고, 누군가의 선언이었다. 극장은 어느새 '말풍선의 숲'이 되어 있었다.

관객들은 그 숲 사이를 걸었다. 손을 뻗어 종이를 붙잡고, 가까이 얼굴을 대고 문장을 읽었다. 어떤 이는 오래 서 있었고, 어떤 이는 빠르게 지나갔다. 누군가는 한 문장 앞에서 멈추었고, 누군가는 다른 종이를 찾아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허공에 매달린 문장들은 완성된 대사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눈높이에서 흔들렸고, 관객의 손에 붙들렸고, 관객의 입으로 옮겨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풍경은 묘했다. 대극장의 거대한 무대기계와 조명탑, 위에서 떨어지는 빛줄기 사이로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무대 뒤편의 장치들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 매달린 종이들은 오래된 전단 같기도 하고, 집회 현장에서 들려온 피켓 같기도 했다. 검은 바닥 위에 흰 종이들이 떠 있고,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광장의 소음은 사라졌지만, 광장에서 가져온 말들은 극장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진행된 <프로파간다> 장면
ⓒ 이규승
대극장에서 진행된 공연의 핵심은 '말풍선'이다. 무대 위에 걸린 말풍선들은 하나의 정치적 입장으로 정리된 문장이 아니었다. 동료 시민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취합된 주장과 메시지, 창작자와 참여자들이 남긴 짧은 선언과 고백이다. 관객은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마음에 드는 말풍선을 고르고, 읽고, 반복하고, 자기 몸에 잠시 들였다. 공연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 타인의 말을 자기 몸으로 통과시키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짧고 강했다.

"침묵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연대다."
"어찌됐든 움직이자,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걸 하자. 냉소 저리 비켜!"
"자기가 누구인지에 대해 미안하지 말자!"
"느리고 낡았고 쓸모없고 하찮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힘을 느껴보자."

이 문장들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왔지만, 이상하게 하나의 흐름을 만들었다. 지금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감각,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말해야 한다는 감각, 조금 어긋나더라도 함께 서야 한다는 감각이다.

참여자들의 말풍선에는 이번 공연이 지닌 윤리도 담겨 있었다. 누군가는 행함의 힘을 믿는다고 썼고, 또 다른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또한 선택의 결과라고 적었다. 이것은 거대한 정치 선언이라기보다 삶의 태도에 가깝다. 변화는 완벽한 말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몸짓, 작은 선택, 어색한 참여, 서로 다른 말들을 견디는 시간에서 시작된다.

잠시 뒤 관객들은 둥글게 앉았다. 객석과 무대의 방향은 사라졌다. 앞과 뒤,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의 구분도 흐려졌다. 조명은 강하게 내리꽂혔고, 노란빛과 흰빛이 검은 바닥 위에서 번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거나 같은 중심을 향해 앉았다. 누군가는 바닥에 다리를 접고 앉았고, 누군가는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무대 한가운데에는 밝은 빛이 놓였고, 그 빛을 둘러싼 사람들의 그림자가 벽과 바닥에 번졌다. 그 순간 극장은 더 이상 공연을 '보는' 공간이 아니었다. 말이 오가기를 기다리는 임시 광장이었다.

'프로파간다'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는 광장에서 집회를 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와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장 내부의 관람 방식을 바꾼다. 관객을 객석에서 끌어내 무대 위로 올리고, 무대 위에 다시 광장의 조건을 만든다. 사람들은 흰 종이들 사이를 걸으며 자기 말을 찾고, 타인의 말을 빌리고, 어떤 문장 앞에서 멈춘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감상자가 아니라 선택자가 된다. 그리고 선택한 말풍선을 자기 몸으로 읽는 순간, 그는 잠시 발화자가 된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은 선전, 선동, 조작, 왜곡의 이미지가 먼저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 공연은 그 단어를 단순히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한다. 말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인가. 어떤 말은 사람을 억압하지만, 어떤 말은 침묵하던 사람에게 입을 돌려준다. 어떤 구호는 복종을 만들지만, 어떤 구호는 함께 서 있는 감각을 만든다. 문제는 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며, 누구를 지우고, 누구를 불러들이느냐에 있다.

물론 이 공연은 매끈하지 않다. 말들이 서로 어긋나고, 의제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때로는 산만하고 과잉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광장의 호흡에 가깝다. 광장은 늘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분노와 두려움, 농담과 절박함이 한데 섞인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불편하게 부딪치고, 그래도 함께 머물며, 다시 말할 수 있을 때 민주주의는 겨우 움직인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거대한 결론이 아니었다. 둥글게 앉은 사람들, 허공에 매달린 종이들, 눈을 찌르는 빛줄기, 검은 바닥 위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그리고 누군가가 조용히 고른 한 문장이었다. 관객은 그 문장을 읽으며 잠시 멈추었다. 그 문장이 완전히 자기 말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순간, 그는 타인의 말을 지나치지 않았다. 읽었고, 붙잡았고, 자기 목소리로 통과시켰다.

<여는 마당: 프로파간다>가 남긴 질문은 선명하다. 극장은 다시 광장이 될 수 있는가. 집회를 통과한 관객은 더 주체적인 관객이 될 수 있는가. 타인의 말풍선을 고른 사람은 그 말을 잠시나마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정답은 무대 위에만 있지 않았다. 마로니에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발밑에, 극장으로 걸어 들어가던 짧은 침묵에, 말풍선을 고르던 손끝에 있었다. 민주주의는 이미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매번 누군가의 목소리로 다시 채워져야 하는 자리다. 이 공연은 그 괄호를 극장 한가운데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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