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전 기사 한 줄에서 길어 올린 이름, 동화가 되다
[박보현 기자]
"백정 새끼다!"
세죽은 움찔했다. 자칫하면 어른 싸움이 지겨운 아이들이 백정 새끼를 놀리려고 몰려들 판이었다. 세죽은 부리나케 달아날 요량으로 주먹을 꼭 쥐고 빠르게 걸었다. 하지만, 아이의 목소리는 어른들이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에 파묻혔다.
세죽은 뛰다시피 걸으면서 뒤를 힐긋 돌아봤다. 세죽은 그 찰나에 한 사내아이가 돌멩이를 주워 드는 것을 봤다. 백정 새끼를 그대로 보내지는 않겠다는 거였다. 세죽은 곧바로 몸을 돌려 냅다 달렸다.
"낌새가 안 좋으면 그냥 줄행랑치그라.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버서 피하지."
어머니는 어린 딸을 험한 바깥세상에 내보내면서 그리 일렀다. 피해라, 눈치껏 화를 피해라. 그게 조선에서 백정이 살아온 방법이었다. - <고기장수 박세죽> p.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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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표지 |
| ⓒ 푸른숲주니어 |
김해원 작가의 신작 동화 <고기장수 박세죽>(2026년 4월 출간)은 바로 그 소녀의 시선으로 1920년대 조선 사회의 차별과 형평운동의 역사를 되살린다. 단지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차별 속에서도 친구를 만나고, 무대에 서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 앞에 내놓으며 조금씩 성장해 가는 한 인간의 뜨거운 이야기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놀랍게도 1928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속 단 한 줄이었다.
"형평사 전국대회 여성 대의원 박세죽."
김해원 작가는 실존 인물의 짧은 기록에서 상상력을 길어 올렸다. 역사 속에서 거의 지워졌던 형평운동 여성들의 존재를 한 소녀의 삶으로 복원해 낸 것이다.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된 형평사는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목표로 백정들이 스스로 조직한 인권 운동 단체였다. 조선 시대 최하층 천민으로 차별 받던 백정들은 형평사를 통해 야학을 세우고 전국 조직을 확대하며 평등을 외쳤다. 회원 수는 4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독립운동이 나라 밖의 적에 맞선 투쟁이었다면, 형평운동은 우리 안의 차별을 향한 싸움이었다.
형평운동 속 여성들의 역할을 부각하다
특히 이 작품은 형평운동 여성들의 역할을 전면에 세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형평사 여성회는 조혼 폐지와 여성 교육 문제를 논의했고, 1926년 전국대회에서는 '형평여성문제'가 정식 의제로 다뤄졌다. 1928년 전국대회에서는 여성 대의원 박세죽이 실제로 참석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형평운동 서사에서 여성들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동화 속 세죽은 양반집 아기씨 허선옥과 친구가 되고, 진주소년회 공연 무대에도 선다. 자기 이름을 숨기던 아이가 "박세죽"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경험은 독자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짜 힘은 차별과 폭력 앞에서 흔들리는 세죽의 선택에 있다. 도망칠 것인가, 남아서 싸울 것인가.
양상용 작가의 그림 역시 작품의 결을 단단하게 만든다. 진주 골목과 장터, 씨앗골 풍경과 아이들의 표정을 담아낸 그림은 당시의 공기까지 생생하게 복원한다. 여기에 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의 감수가 더해져 형평운동과 백정 차별의 역사적 맥락을 어린이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고기장수 박세죽>은 지금의 시대와 맞닿아 있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여전히 일상 곳곳에 스며 있는 오늘, "백정 자식도 학교에 들어갈 수 있나?"라고 묻던 100년 전 아이들의 현실은 낯설지만은 않다. 그래서 이 동화는 과거 이야기를 넘어, 오늘 우리 사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신진균 이사장은 추천사에서 "형평운동의 역사 속 여성 자료의 부족과 여성주의적 시각의 부재라는 오래된 과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진주 사투리와 공간의 생생한 재현을 통해 형평 정신의 울림을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 사회 교과와 연계해 읽을 수 있는 역사 동화이면서도,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라는 보편의 가치를 깊게 품고 있는 책. <고기장수 박세죽>은 어린 독자들에게는 용기의 이야기로, 어른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아직 건너지 못한 차별의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단디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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