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어지고 틀어지고 멀쩡한 나무가 하나도 없는 숲

최옥화 2026. 5. 1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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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덕왕릉으로 가는 길... 자연도 사람도 시련을 겪으며 살아내는 건 마찬가지

[최옥화 기자]

경주 흥덕왕릉은 신라 제42대 왕 흥덕왕(재위 826~836)의 능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자리하고 있다. 사적 제30호로 지정된 이 왕릉은 12지신상과 호석을 갖춘 전형적인 신라 왕릉 양식으로,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능 주변을 무인석과 문인석이 호위하고, 그 바깥으로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다.
▲ 소나무숲 흥덕왕릉 가는길
ⓒ 최옥화
경주 흥덕왕릉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 숲을 통과해야 한다. 지난 6일, 소나무 숲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흠칫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곳 소나무는 다른 숲의 느낌과는 다른 특별한 경외감이 든다. 구불구불 휘어지고 틀어지고, 용이 승천하는 듯한 외피에다 또아리 튼 뱀 모양 같기도 한 형체를 가진다. 어느 하나도 매끈하게 솟아 자란 나무가 없다. 마치 이 마을에는 '곧게 자라서는 안 된다'는 오래된 규범이라도 있는 듯하다.
▲ 소나무 흥덕왕릉 소나무
ⓒ 최옥화
▲ 소나무 흥덕왕릉 소나무
ⓒ 최옥화
삶이 참으로 고단했구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얼마나 힘든 땅이었으면, 얼마나 바닷바람이 매서웠으면 이토록 처절하게 구부리며 자라났을까! 문득 생각했다. 이 소나무들이 그렇게 고단하게 자란 세월 동안 능 안의 왕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흥덕왕은 사랑하는 왕비 장화왕후를 먼저 떠나보냈다. 그 후 평생 재혼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할 만큼 그리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왕이라는 자리가 외로움을 막아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눈을 감은 뒤엔 곧 왕위 다툼이 벌어졌고, 그것이 결국 신라 멸망의 서막이 되었다. 나라의 끝을 예감하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왕의 마음.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또 하나 특이한 것이 있다. 보통 바닷가 소나무들은 해풍을 등지고 한 방향으로 눕는다. 그런데 이 소나무들은 왕릉을 향해 양 편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왕릉을 호위하고 있는 소나무들이 한쪽 방향이 아니라, 왕릉을 향해 양쪽에서 중앙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을 알현하는 신하처럼, 혹은 오랫동안 그 슬픔을 함께 지켜온 벗처럼. 어쩌면 이 소나무들은 그 고단한 마음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서운 바람에 구부러진 것이 아니라, 왕의 외로움과 나라의 무게를 온몸으로 함께 짊어지며 그렇게 휘어진 것이라고. 왕의 생애에 감정 이입해 문학적으로 보면 이런 애틋한 서사가 그럴 듯하게 보인다.
▲ 왕릉 소나무 흥덕왕릉 소나무
ⓒ 최옥화
그러나 과학적으로 보면 이유는 이는 빛을 향하는 식물의 본성 때문이다. 식물은 본능적으로 빛을 향해 자라는데, 숲 안쪽은 나무들이 빽빽해 어둡고, 왕릉 쪽만 넓게 트여 있다. 양쪽 소나무들이 각자 빛이 가장 많은 방향, 즉 열린 왕릉 쪽으로 몸을 뻗은 것이다. 왕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향해 고개를 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는 상상이 깊어진다. 소나무들이 향한 것은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이 있는 자리에 왕이 누워 있었다. 명당(明堂)이란 글자 그대로 밝고 트인 곳이다. 결국 왕은 빛이 모이는 자리에 누워 있고, 소나무들은 천 년 동안 그 빛을 향해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여온 것이다. 권력이란 빛이고 그래서 그렇게 주변을 끌어당기는 기운일지도 모른다.
▲ 소나무 흥덕왕릉 소나무
ⓒ 최옥화
곧게 자라지 못했다고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니다. 이 소나무들은 구부러진 채로 천 년을 버텼다. 휘어진 방식대로, 자기 몫의 빛을 온전히 차지하며. 삶의 마디마다 닥쳐온 시련을 견디며 온몸으로 멍이 든 채 휘어지며 꺾어지며 세월을 살아낸 우리네 인생도 이 소나무들처럼 그만큼 잘 살아 온 것이다. 참 장하다. 소나무에게도 나에게도 따스한 손을 내밀어 쓰다듬어 주고 싶다.

사진 작가들은 이곳을 촬영하기 위해 안개 낀 새벽이나 비 오는 날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면 말 그대로 이곳 소나무 숲은 천 년의 생을 품고 용들이 승천하는 듯 신비로운 세계로 변할 것 같다.

휘어진 것은 굴복이 아니다.
함께 아파온 것이다.
그리고 끝내, 빛을 향한 것이다.

화려한 볼거리나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흥덕왕릉을 지키고 선 소나무 숲에 서서 그 옛날 백성들의 고단했던 삶과 우리의 인생을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러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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