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뉴욕 연준은행 금괴 인출사건

김찬희 2026. 5. 12.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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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희 논설위원

달러 패권의 상징 같은 곳에서
프랑스중앙銀, 129t 전량 빼내

금 귀환 단행했던 독일도 들썩
달러 안전한가 잇따라 물음표

다극화, 각자도생 지목하는 금
얽히고설킨 안보·경제 지형 속
한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물어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서너 블록 떨어진 리버티스트리트 33번지엔 고색창연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의 지하 5층, 지표면에서 약 24m 깊이에 거대한 금고가 자리한다. 문 무게만 90t에 이르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 금고의 공식 명칭은 ‘뉴욕 연방준비은행 금 저장고(Federal Reserve Bank of New York Gold Vault)’이다. 여기에는 각국 중앙은행에서 맡긴 금 6000t이 구획으로 나누어져 금괴 형태로 잠들어 있다. 다만 미국 정부가 보유한 금 8133t의 절반가량은 켄터키주 녹스 기지에 분산 저장돼 있다. 두 곳 모두 철통 보안을 자랑한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은 여기에다 국제 금융시스템 안에서 높은 신뢰까지 받는다. 그런데, 최근 뉴욕 연준은행에서 금괴가 인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단번에 뺀 건 아니다.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7개월에 걸쳐 꾸준하게 이뤄졌다. 인출자는 프랑스 중앙은행(프랑스은행, Banque de France)이고, 인출 규모는 뉴욕 연준은행에 맡긴 129t 전량이었다. 프랑스은행은 찾아간 금을 몽땅 팔고 같은 규모를 유럽에서 매입해 정부 보유분 2437t을 모두 파리에 두게 됐다고 지난달에서야 밝혔다. 프랑스가 해외에 둔 금을 뺀 게 처음은 아니다. 1963~66년 미국과 영국에 있던 금 가운데 상당량을 본국으로 회수하는 ‘골드 리패트리에이션(Gold Repatriation)’을 단행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외 보관 전량을 뺐다. 공개 시점도 묘하다. 미국이 이란을 전격적으로 공습하며 전쟁이 발발했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에 불만을 쏟아낼 때였다. 프랑수아 빌르루아 드갈로 프랑스은행 총재는 정치적 동기와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더 수상하다. 달러와 금을 연동하는 금 태환은 중단된 지 오래이지만, 뉴욕 연준은행 금 저장고는 달러 패권의 상징이다. 여기서 금을 빼냈다는 건 미국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프랑스만 그런 건 아니다. 프랑스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독일 여론이 들끓었다.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은 미국에 이어 세계 금 보유량 2위(3350t, 중앙은행 기준)다. 금의 37%를 뉴욕에, 13%를 런던에 두고 있다. 나머지 절반은 프랑크푸르트 본점에 보관 중이다. 절반이 독일에 있는 건 2012년 불거진 ‘골드 리패트리에이션’ 덕이다. 냉전 시기에 독일은 안보·동맹 관계, 소련 침공 가능성 등을 이유로 미국, 영국 등에 대부분 금을 맡겼다. 그러다 독일 연방회계감사원에서 분데스방크 감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분데스방크가 해외에 보관하는 금의 실물을 한 번도 점검하지 않았다는 게 방아쇠였다.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에 호되게 당했던 터라 국가신용의 최후 보루를 외국에 두는 게 맞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진짜로 금이 있는 게 맞느냐는 의심마저 불거졌다. 분데스방크는 부랴부랴 2013년부터 회수 작전에 들어갔고, 2017년에 금 674t의 귀환을 끝냈다. 이웃인 네덜란드는 2014년 122t을 뉴욕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슬그머니 옮겼다.

프랑스의 금괴 인출이 다른 나라로 확산할지 알 수 없다. 전례를 보더라도 철저하게 물밑에서 작업하고, 결과도 한참 뒤에 공개할 것이다. 하지만 수면 아래 깊숙한 곳에서 도도한 흐름이 감지된다. 러시아,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은 부지런히 금을 사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은 분주하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중이다. 이런 움직임들이 가리키는 건 불안이다. 달러 체제의 붕괴는 아니지만, 달러만 믿기에 세계가 너무 불안정해졌다는 신호다. 그동안 미국은 압도적 제조업 역량, 달러 기반 석유 거래로 패권을 유지했다. 이게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란 전쟁은 막대한 부채, 엄청난 전쟁 비용, 허약해진 제조업 기반을 노골적으로 들춰낸다. 달러가 절대적으로 안전한가라고 묻는다.

지구촌을 지탱했던 국제질서는 불확실성 속에서 무너지고 찢어지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미국의 패권에 균열이 생기면서 파편이 난무하고 있다. 그 틈에서 가장 오래된 자산이자, 최종적 안전자산이며, 화폐의 그림자인 금은 ‘다극화’ ‘각자도생’을 지목한다. 얽히고설킨 실타래 같은 안보·경제 지형에서 한국은 어디쯤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할까. 금괴 129t 인출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김찬희 논설위원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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