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상의 브랜드 스토리] ‘높이의 성장’ 대신 ‘깊이의 성장’ 이끄는 작은 브랜드 시대

‘내게 더 잘 어울리는’ 브랜드 추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만드는
인도 출판사 타라북스가 대표 사례

2000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리 곳곳에 ‘선영아 사랑해’라는 사랑 고백 포스터가 나붙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인 ‘마이클럽 닷컴’의 티저 캠페인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티브이 광고가 아닌 온라인을 통해 자발적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광고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다. 이른바 닷컴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잘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꿈을 찾아 인터넷 베이스의 비즈니스 생태계로 뛰어들었다. 이런 흐름은 ‘스타트업’ 열풍으로 이어졌고, 바야흐로 작은 브랜드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AI라는 초고속 급류에 올라탄 요즘, 이런 이야기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야기이다. 작은 브랜드 시대의 문이 열린 것은 크게 세 가지 변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컴퓨터가 책상 위로 올라오면서부터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토지, 노동, 자본이라는 생산의 3요소를 갖추지 않더라도 좋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창업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두 번째 변화인 인터넷의 일상화는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하지 않고도 자신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잠재 타깃과 연결되도록 해주었다. 여기에 사람들이 삶을 사는 방식의 변화가 더해지면서 작은 브랜드의 출현과 성공은 가속화되었다. 브랜드 관점에서 삶을 사는 방식의 변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소비 패턴의 고도화’라고 할 수 있다. 직간접적인 소비 경험이 축적되면서 사람들의 소비 지능은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고, 이런 변화는 소비 시장의 초세분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비자 측면의 변화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경제 성장과 함께 사람들의 전반적인 라이프스타일 역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좋은 것, 덜 좋은 것, 안 좋은 것으로 단순하게 나뉘었던 시장은 좋은 것들을 중심으로 세분화되기 시작했고, 세분화가 거듭되면서 파편화라는 단어가 과하게 들리지 않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화장품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내가 처음 광고 회사에 들어왔던 1980년대 후반을 돌이켜보면 당시 시장의 주요 화장품 브랜드는 3개뿐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소비자들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 속에서 관계를 맺고 사는 화장품의 브랜드 숫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늘어났다(정확한 통계를 찾을 수 없지만 등록된 화장품 판매 회사의 수를 근거로 추산해 보면 3만~4만개는 족히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시장을 주도했던 3개의 브랜드도 타깃과 용도에 따라 이미 수십 개의 브랜드로 분화되어 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이유들로 인해 작은 브랜드 시대의 문은 활짝 열렸다. 이는 고도화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킨다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건강한 소비 시장 생태계를 만든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20세기까지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의 고속 성장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경제 전반에 끼친 긍정적인 효과도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20세기 경제 발전을 이끌었기 때문에 고속 성장의 패러다임이 21세기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30살이 넘어서도 키가 크는 것이 성장이라고 믿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물리적 성장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감성적, 지적 성장을 해야 한다. 소비 시장도 다르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더 많이’나 ‘더 크게’가 아니라 ‘더 나은’이나 ‘더 잘 어울리는’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브랜드의 역할도 그와 같은 결로 진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이제 ‘높이의 성장’에서 ‘깊이의 성장’으로 바뀌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서 작은 브랜드가 역할을 해야 한다. 작은 브랜드에 관한 강연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작은 브랜드의 기준은 무엇인가요?’이다. 바리스타 혼자 운영하는 동네 카페도 작은 브랜드이고, 기업 가치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신생 저가 항공사도 작은 브랜드이다. 작은 브랜드의 기준은 절대적 크기나 규모가 아니다. 높이나 크기의 성장이 아닌 깊이와 영향력의 성장을 추구하는 브랜드인가가 ‘작은’을 결정하는 기준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런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큰 브랜드는 깊이의 성장을 할 수 없는가?” 나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큰 브랜드는 조직의 지속성을 위해 그 규모에 걸맞은 매출이나 이익 창출이 필수적이다. 이런 구조적 원인으로 인해 제한적 크기의 파편화된 시장에 적합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 시장 생태계 발전에서 작은 브랜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마치 숲이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 야생화가 공존해야 하는 것처럼 큰 브랜드는 나름대로 시장에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작은 브랜드는 큰 브랜드만으로는 메꿀 수 없는 깊이의 성장이라는 공백을 채워 나가야 한다. 인도 남부 첸나이에 자리잡고 있는 타라북스라는 출판사의 사례가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를 잘 전달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직원 수 20여명에 불과한 작은 조직으로 운영되는 타라북스는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브랜드이다. 인도의 전래동화를 중심으로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출판한다. 폐 옷감 등을 활용해 직접 만든 종이 위에 한 장 한 장 실크 스크린으로 그림을 인쇄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만든다. 1994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처음 등장했던 타라북스는 독창적인 제작 방식과 출판 철학을 통해 아름다운 책을 원하는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대형 출판사가 아름다운 책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타라북스의 방식으로 책을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세상에는 베스트셀러를 찍어내는 출판사도 있어야 하지만 주문하면 6개월 이상 걸리는, 아름다운 책을 만드는 작은 브랜드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KS'IDE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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