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까지 딸린 공간에서 1년 살이, 고흥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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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욱 기자]
5월의 하늘은 한없이 높고 푸르다. 녹음이 짙어가는 산야를 배경으로 펼쳐진 낮은 구릉의 논밭에서는 마늘과 양파가 토실토실 영글어간다. 맥류나 사료 작물을 심지 않은 논은 정지 작업을 끝내고 수로를 따라 물을 대느라 분주하다. 부지런한 농부는 벌써 모내기를 마친 곳도 있다. 한적하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다.
지난 1월 초에 이곳 '와야 고흥스테이'로 거처를 옮긴 지 어느덧 5개월이 지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월은 썰물에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한 움큼씩 빠르게 빠져나간다. 고흥 반도 초입 병목처럼 생긴 남양면에 자리 잡은 고흥스테이는 폐교된 와야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세운 고흥귀농귀촌행복학교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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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흥귀농귀촌행복학교 남양면 와야초등학교 폐교를 리모델링 해 조성한 귀농귀촌행복학교는 고흥군에 귀농어 및 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에게 필요한 교육과 함께 농어촌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 ⓒ 임경욱 |
고흥군은 전국적으로 대표적인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으나, 시류를 거스를 수 없는 모양이다. 지역의 아름다운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연계해 관광객을 유입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수도권과 대도시에서 원거리에 있어 여의치 않아 보인다.
고흥에서 살아보기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고흥스테이는 도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어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거 환경과 냉난방, 벌레 방제 등 시골살이의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어진 숙소다. 생활공간이 28제곱미터로 다소 협소하긴 해도 1~2명의 거처로는 충분해 귀농·귀촌을 꿈꾸는 사람들이 선호하고 있다.
가구마다 집 옆에 딸린 15제곱미터 정도의 텃밭에 채소를 재배할 수 있어 입주민들은 꽃밭 일구듯 취미 삼아 과채류를 심어 가꾸고 있다. 나도 지난 4월 초순에 밭에 잡초를 제거하고 상추와 아욱, 들깨, 치커리, 비트 등의 종자를 뿌려뒀는데, 노지에 뿌린 탓에 발아가 더뎌 이제야 상추와 아욱만 움이 올라왔다.
옆집 채마밭의 무성함에 마음이 조급해 5월 초에는 고추 몇 그루와 가지, 방울토마토, 옥수수, 호박 등의 모종을 종묘사에서 사다가 심었다. 주말에는 가족 품으로 갔다가 주중에 내려와 물을 뿌려주곤 했더니, 다행히 죽지 않고 지금까지 생명을 버티고 있어 기특하다. 척박한 땅에서 따가운 햇빛과 바람을 견디며 커가는 연약한 모종을 보면, 이 작은 생명 속에 깃든 우주적 의지를 깨닫는다.
"신이 곧 자연"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이 가슴으로 다가온다. 신은 저 멀리 하늘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따스한 햇살과 텃밭의 흙, 그리고 내 손끝을 타고 흐르는 만물의 원리 그 자체인 것이다. 여자만에서 불어오는 동풍과 득량만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갯내음을 가득 실어와 내 텃밭을 풍성하게 키워주리라 믿는다.
지난해 구례에서의 1년살이는 산과 강이 함께 해 준 시간이었다(관련 기사 : 퇴직 후 농촌에서 1년 살기를 시작합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자연 법칙이다. 산과 물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맞닿아 있는 그 경계에 형성된 구례는 순응과 조화 속에서 생명이 가장 풍요롭게 움트는 곳이었다.
이곳 고흥은 산야와 더불어 바다까지 함께 해줘 훨씬 더 풍성하다. 팔영산, 천등산, 적대봉 등 적당한 높이의 산들이 사계절 내내 산행의 즐거움은 물론, 편안한 휴식을 제공해 준다. 여수반도로 이어지는 팔영대교와 나로도를 잇는 다리, 소록도와 거금도를 연결한 다리들이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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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와야고흥스테이 고흥귀농귀촌행복학교 내에 조성된 와야고흥스테이 전경입니다. 가구마다 취향에 맞게 채소를 가꿀 수 있도록 텃밭이 딸려 있습니다. |
| ⓒ 임경욱 |
제주도에서는 보말로 잘 알려진 소라 고둥을 잘 삶은 후 바늘로 까서 탕이나 국으로 끓여 먹기도 하지만, 전라도 지방에서는 부추를 썰어 넣고 간을 해 참기름에 무치면 그 맛이 일품이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지붕 없는 미술관 고흥군은 이처럼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하다.
해가 지는 다도해의 바다는 자연이 만드는 평화다. 마음이 스산한 날은 어디든 육지와 섬을 잇는, 섬과 섬을 잇는 바다 위 다리로 달려가 노을이 내리는 바다를 본다. 점점이 박힌 섬들과, 그 사이를 오가는 어선들이 노을 속에서 몽환적이다. 일상에서의 편견을 버리고 우주의 거대한 질서를 겸허하게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다.
바다는 내게 말한다. 일상의 자잘한 소란을 잠재우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성찰하며 거대한 우주의 신비와 대면하라고. 수평선 너머로 해가 저물 때, 비로소 나의 하루도 지붕 없는 미술관의 한 폭 그림이 된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안분지족(安分知足)하며 자연의 시간에 나의 박자를 맞추는 삶을 살고 싶다. 그동안 물욕에 허덕이던 욕망의 안경을 벗고, 내게 주어진 분수를 명확히 알고 그 안에서 조화를 찾고 싶다. 텃밭에 심은 고추와 호박 모종 같은 실체에 사랑의 눈길을 주며 살아야겠다. 5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해변에서 밀려온 갯내음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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