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해야 할 삶의 태도에 관하여
[전영선 기자]
며칠 전, 큰아이가 아침 밥상에서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충주맨(과거 충주시 유튜브 채널을 담당했던 공무원)에 이어 요즘은 출판사 직원이 핫하다면서. 보여준 영상은 '유퀴즈'였는데 손님으로 등장한 이는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곳으로 유명한 국내 출판사 직원 두 명이었다.
그중 핫하다는 이는 '김민경'이라는 이름의 편집자였다. 영상 속에서 그녀는 언론고시를 준비하다 경력 하나 없는 31살이 되었던 취준생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유쾌하면서도 진솔한지 큰아이가 핫하다고 말한 이유를 짐작하게 했다.
영상에서 각별하게 인상에 남았던 장면은 둘이었다. 하나는 편집부장이 직원들에게 썼다는 이메일. 또 다른 하나는 영상 말미에 소개된 안톤 체호프의 단편 <내기>. 이메일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퇴근하실 때 창문을 꼭 닫고 가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요새 날이 추워서 모기가 기를 쓰고 들어옵니다. 가을 모기가 슬프다고 했던 다자이 오사무는 제대로 물려본 적이 없는 게 틀림없습니다. 부디 꼭 닫고 가 주세요."
이메일이 꼭 한 편의 시 같다. 창문을 닫아 달라는 부탁의 말도 이리 문학적으로 하는 상사라니, 함께 일하는 직원도 아니면서 잠시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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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호프 단편선』(일송북)에 실린 <내기> 10여 년 전 읽으며 휘갈긴 메모가 눈에 들어온다. |
| ⓒ 전영선 |
<내기>는 한 은행가가 사형 제도를 두고 젊은 변호사와 갑론을박을 벌인 일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은행가는 15년 전, 어느 파티에서 젊은 변호사와 사형 제도를 두고 다툼을 벌였다. 이날 은행가는 사형이 더 윤리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입장인 반면 변호사는 종신형이 더 낫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결국 둘은 어느 입장이 더 나은지 입증하기 위해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은행가는 돈을 걸고, 변호사는 자유를 걸고.
그들의 내기는 젊은 변호사가 15년의 시간을 은행가의 집 정원에 마련된 바깥채에서만 보내야 하고(그동안 바깥채의 문턱을 넘을 권리, 살아 있는 사람들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권리, 그리고 편지나 신문을 받아볼 권리를 박탈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악기를 지니고 있거나 책을 읽고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일은 허용되었다), 이 시간을 버텨낼 경우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200만 루블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정된다.
소설은 변호사가 감금 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가는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는 첫해에는 피아노를 치고 애정 소설이나 탐정 소설과 같은 가벼운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그다음엔 고전 서적들을 읽고, 그다음엔 술을 마시며 글을 쓰고, 그다음엔 외국어와 철학과 역사에 탐닉하며, 그다음엔 복음서만을 읽고, 그다음엔 신학 관련 서적들만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마지막 2년 동안에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데 작가는 그러한 변호사의 독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의 독서열은,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며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p.152)
젊은 변호사가 감금당한 채 15년이라는 시간을 삶에 대한 탐구로 보내는 동안 은행가는 재산을 불리기 위한 과감한 투자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투자는 실패해 은행가는 변호사에게 대가를 지불할 경우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은행가는 깊은 고뇌에 빠지고 급기야 변호사를 살해하려고 마음먹기까지에 이른다.
이 소설은 변호사와 은행가를 내세워 대비되는 두 삶을 보여준다. 소설을 읽다 보면 변호사는 정신적인 삶만을, 은행가는 물질적인 삶만을 추구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유추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세속적인 삶을 거세당한 변호사의 삶은 의미를 좇아 몸부림치는 여정이다. 그에 반해 구도적인 삶을 거세당한 은행가의 삶은 탐욕을 좇아 몸부림치는 여정이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의 여정을 통해 이상적인 삶이란 무엇일지 독자로 하여금 곱씹어 보게 한다.
그런 까닭에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가 정작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두 사람의 극단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경계해야 할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계약 종료 다섯 시간 전에 의도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변호사와 이에 감명받아 눈물을 흘리지만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은행가를 보여주며 소설이 끝을 맺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마도 변호사의 삶에서는 허무를, 은행가의 삶에서는 무감함을 경계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44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기까지 작가이자 의사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던 작가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은 더욱 짙어진다.
<내기>는 승패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도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는 작품이다. 변호사가 이겼다거나 은행가가 이겼다거나, 아니면 비겼다거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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