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의 주인은 누구인가... 두산 야구에선 OO의 냄새가 난다
그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야구팬이 되었고, 무엇을 견디며 남았으며, 무엇 때문에 떠났는가. 이 연재는 한국야구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 야구팬들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시도다.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함께 웃고 울었던 시간, 구단과 선수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이 연재는 분석이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우리는"이라는 1인칭 복수의 시점으로, 야구팬들에게 보내는 연대의 편지다. <기자말>
[김은식 기자]
잠실에서 '왕조 건설'을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면, 아마도 LG 트윈스의 팬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왕조'가 이루어진다면 마다할 리야 없겠지만, 그게 그렇게 목 놓아 외칠 일인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아마도 두산 베어스의 팬들일 것이다. 트윈스의 팬들이 언젠가 찾아올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꾸며 비루한 현실을 견뎌 나간다면, 베어스의 팬들은 오늘과 내일에 집중하며 성실하게 일상의 기적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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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4월 30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6 프로야구 KBO리그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경기. 8-5로 승리한 두산의 박준순과 선수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
| ⓒ 연합뉴스 |
1981년 5월부터 시작된 프로야구 창설 작업은 이듬해 1월부터 6개 구단의 창단식이 진행되고 그해 봄에 개막전이 치러지는 아찔한 속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으니 충청권을 연고로 삼아 창단해야 할 최적의 기업인 한화그룹이 이리역 폭발 사고의 후폭풍 속에 창업주의 상을 치르고 후계 작업을 하느라 몇 년쯤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결국 코앞으로 다가온 출범 일정을 맞추기 위해, 한국야구위원회는 두산 그룹에 도움을 요청했다. 딱 3년만 충청권을 맡아달라는. 대신 3년 후에는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기로 하고, 그 이전 3년간 서울 출신 선수들 중 1/3의 선발권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약속대로 베어스는 3년간 대전에서 머물다가 한화 그룹이 창단한 빙그레 이글스에게 넘기고 4년째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서 자리 잡은 곳은 원래 동대문야구장이었지만, 아마추어 야구와의 경기 일정 조율이 어려워지자 1986년부터는 잠실을 LG와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전에서 태어나 동대문을 거쳐 잠실에 자리 잡은 야구팀. 원래 맥주를 만들던 모기업이, 맥주(비어)와 발음이 비슷한 영어 이름을 가진 동물(베어)을 팀 이름으로 사용한 야구팀. 그래서 대전 출신과 서울 출신이 뒤섞인 선수단이, 매일 운동을 마친 뒤 맥주를 마시며 느긋한 결속력을 다지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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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년 우승축하연 한국프로야구 원년챔피언은 베어스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들과 맥주는 떼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들의 모기업은 맥주회사였고, 팀 이름은 '맥주(beer)'와 발음이 비슷한 동물 '곰(bear)'으로 지어졌다. |
| ⓒ 두산베어스 |
그런 전통은 오래도록 흐르고 흘러, 베어스는 지금도 다양한 배경의 선수들이 녹아들기 가장 덜 어려운 팀으로, 그리고 선수 개인이 혼자 기쁨을 독점하기 가장 어려운 팀으로 남아 있다. 세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하면서 그 정도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팀의 오랜 역사로부터 오늘날 그 팀 팬들의 색깔마저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한적했던 평일 저녁 잠실 관중석 한 쪽에서 햄버거 한 개와 맥주 한 캔을 앞에 두고, 넥타이 풀고 단추 몇 개 열어 놓은 느슨한 와이셔츠 차림으로 저녁 식사를 겸한 퇴근 후 한때를 보내는 이들이 두산 베어스 팬들의 전형적인 모습 중 하나였다. 1년 내내 입장권 예매를 위한 '광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요 몇 년은 또 다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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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구한 뒤 포수 양의지와 포옹하는 펭수 야구란, 그들의 일상을 곱씹어 반성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매개물은 아닐까 |
| ⓒ 두산 베어스 |
더구나 베어스는 '스타플레이어'와는 거리가 좀 있는 팀이었다. 90년대 중반, 대학 시절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투수 이상훈과 유격수 유지현이 날고뛰던 잠실 라이벌 트윈스와 엎치락뒤치락 우승을 주고받던 베어스의 에이스 김상진과 유격수 김민호는 신고선수 출신이었다. 2000년대 중반 '초고교급' 박병호과 박경수를 뽑아놓고도 좀처럼 터지지 않는 잠재력에 속 태우던 트윈스의 곁에서,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며 부채질을 하던 베어스의 간판 손시헌과 김현수도 역시 신고선수로 입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최강'이나 '왕조'니 하는 단어와도, 어쩐지 딱 달라붙는 이름이 아니다. 해태는 80~90년대, 현대는 2000년대 초반, SK는 2000년대 후반, 삼성은 2010년대 초반 '전성기'를 떠올리지만 두산의 전성기는 딱 떠오르지 않는다. 무려 6번의 우승과 9번의 준우승을 경험한 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는 이들이 제법 있을 정도다. 그저 늘 강했지만, 소문나게 압도적으로 강했던 적은 거의 없는 팀이고, 그러면서도 심심찮게 더 강했던 팀을 주저앉히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왕좌에 조용히 올라앉는 팀.
베어스가 강했던 것은 늘 육성하고, 훈련하고, 또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서다. 그래서 화려하진 않지만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많이 움직이고, 조금 더 버티면서 싸우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전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달린 끝에 찾아낸 기회의 순간을 잡아내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어스를 늘 지켜보고 교감하며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그런 에너지와 색깔이 오랜 세월 쌓여있다. 옆 동네 LG 트윈스의 팬들이 원대한 꿈을 품고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 야심가라면, 두산 베어스는 발밑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생활인들이다. 그래서 엘지의 잠실에 '내일은'이 울려 퍼진다면, 두산의 잠실에는 '오늘도'가 메아리친다.
왕조보다 미라클! 뚝심! 허슬!
그곳에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버텨냈다'는 뿌듯함이 있다. 비록 지더라도 한 경기를 치러낸 것이고, 비록 대단한 성공은 없었더라도 하루를 살아낸 것이 얼마나 대단하냐, 라는 대담한 자기긍정이 있다. 그리고 그 긍정의 배짱은 세상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수는 없지만 다시 내일을 살아갈 힘 정도는 되어준다.
물론 최근 몇 년 사이, 오랫동안 한 걸음 뒤에 머물던 잠실 라이벌인 LG 트윈스가 한발 앞서나가기 시작하고 꽤 현실감 있게 '왕조'를 외치면서 두산 팬들의 마음도 복잡해졌다. '잠실의 주인이 누구냐'는 트윈스 팬의 시비에 응수하던 '누가 더 강하냐'는 답이 입안에서 공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 더 내공 깊은 베어스 팬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대꾸한다. "왕조? 우리는 미라클이다" 왕조를 경험한 구단이 세 개냐 네 개냐 말들이 아무리 많아져도, '미라클', '뚝심', '허슬' 같은 단어들을 쓸 수 있는 것은 베어스뿐이다. 물론 '원년 챔피언'이라는 왕관에 더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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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실야구장의 만원관중 요즘엔 일 년 내내 입장권을 사기 위해 시간 맞춰 '광클전쟁'에 참전해야 한다. |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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