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주의 혁신의 길] R&D 기술사업화라는 전쟁터, 국가가 총대 메야

2026. 5. 11.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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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다. 기술의 전장은 지난 수십 년간 기업의 영역이었다. 더 좋은 제품을 더 빠르게 만드는 기업이 승자가 됐고,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신화가 그 결과였다. 하지만 그 시대는 저물고 있다. 전장은 기업 대 기업의 국지전을 넘어 체제 대 체제의 전면전으로 옮겨졌다. 이제 승부는 개별 기술의 격차를 넘어, 기술의 가치사슬을 장악하는 국가 체제의 역량에서 갈린다. 미국은 스타게이트와 같은 초거대 AI 인프라를 전략 자산화하는 동시에, 관세와 보조금을 지렛대 삼아 글로벌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있다. 일본은 민관 합작법인 라피더스를 통해 2나노미터 첨단 반도체의 설계부터 양산까지 전 과정을 국가 주도로 재건 중이다. 유럽 역시 역내 공급망의 완결성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 진흥책이 아니다. 기술 패권을 안보와 합치하는 ‘신(新)국가주의 기술 체제’로의 패러다임 전환이다.

「 기업 신화에 의존하는 시대에서
신국가주의로 패러다임 전환
미국은 민간 출신에 예산 전권
R&D 체계, AI 활용 재설계해야

미국 조지아공대의 연구진이 DARPA(국방고등연구계획국)의 지원을 받아 양자컴퓨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사진 조지아공대]

‘죽음의 계곡’에서 승부 걸어야
국가 간 체제 경쟁의 진짜 승부처는 연구실과 시장 사이, 그 깊고 어두운 ‘죽음의 계곡(Valley of Death)’에 있다. 긴 호흡의 연구개발과 즉각적인 회수의 시장 논리가 서로를 외면하는 공백의 구간이다. 국가가 책임져야 할 전장이 바로 이곳이다. 민간이 회피하는 거대한 위험을 국가가 모험적 사령부가 돼서 기꺼이 감내할 때, 이 전장은 비로소 기술 주권의 격전지로 거듭난다. 미국은 일찍이 이 전략적 공백을 메울 혁신 조직을 운영해 왔다. 1958년 스푸트니크 쇼크로 탄생한 미국 국방 분야의 DARPA(국방고등연구계획국)가 그 원조라면, 에너지 분야의 ARPA-E(2009년)와 보건 분야의 ARPA-H(2022년)는 그 현대적 진화다. 이들은 민간이 감당하기엔 위험이 크고 기존 연구기관이 하기엔 시장 지향적인 영역을 맡는다. 민간 출신 프로그램 매니저(PM)가 예산 집행의 전권을 가지며, 과제의 진행과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 이 체제의 철학은 단호하다. 모든 과제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안전한 과제에만 세금을 낭비했다는 증거다. 이들의 높은 실패율은 시스템의 결함이 아니라, 혁신을 위해 의도된 설계다.

미국식 혁신의 실체는 단순히 실패에 관대한 문화에 있지 않다. 오히려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기필코 시장에 닿게 하고자 하는 이행 구조에 있다. 예컨대 ARPA-E는 기술 개발 초기부터 ‘T2M(Tech-to-Market·기술사업화)’ 팀을 투입한다. 시작부터 비즈니스 모델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다. 실제로 ARPA-E가 지원한 과제 일부에서 정부 지원금의 수 배가 넘는 후속 민간 투자를 유도하며 죽음의 계곡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결국 혁신의 성패는 시장에 이르는 가교를 얼마나 치밀하게 설계하고 운영하느냐에서 결정된다. 독일 SPRIND(연방혁신도약기구)는 체제 경쟁의 유럽식 해법이다. “지식은 독일에서 만들지만, 이익은 해외에서 챙긴다”는 자성에 따라 2019년에 출범했다. SPRIND는 연방정부가 단독 주주인 유한회사(GmbH)로, 공공성을 띠지만 민간기업같이 운영된다. 또한 2023년 ‘SPRIND 자유법’을 제정해 정부의 감독 범위를 제한하고 독립성을 보장했다. 제안서 신청 2주 만에 자금을 집행하고 필요하면 자회사를 직접 설립하는 파격은 이렇듯 ‘보장된 자율성’에서 비롯된다.

반면, 한국의 공공 R&D는 이 거대한 체제 경쟁에서 이탈해 있다.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세계 최상위권이나 기술무역수지는 만성적자다. 70여 개의 R&D 지원기관이 있지만, 정작 위험을 짊어지는 조직은 보이지 않는다. 혁신도전 프로젝트나 임무 중심 R&D 시도가 수년째 이어졌음에도 정책 효과는 찾기 어렵다. 여전히 고위험 과제는 관료제적 심의 문턱을 넘기 어렵고, 죽음의 계곡을 건너게 할 혁신 조직은 열악하다. 연구가 시장으로 흐르고 지식이 가치로 치환되는 혁신의 선순환 회로가 부실한 셈이다.

우리 R&D 체제가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 지금, 인공지능(AI)이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로 부상했다. AI는 두 가지 방식으로 혁신의 판도를 재편한다. 하나는 연구 생산성의 압축이다. 신약후보 물질 탐색부터 단백질 구조 예측까지, 수년이 걸리던 난제들을 몇 개월 만에 해결하며 죽음의 계곡을 물리적으로 좁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혁신 도구로서의 AI다. AI는 방대한 논문·특허·시장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 시야 밖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연결을 포착한다. 프로그램 매니저(PM)의 통찰력을 보좌하며 전략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미국이 AI를 하나의 신산업이 아닌, 국가를 재설계하는 두뇌로 인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은 개별 산업 경쟁력에 매달려
하지만 한국에서 AI는 여전히 개별 산업 경쟁력의 범주에 있다. 누가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드냐는 기술적 경쟁에 집중할 뿐, 국가 체제의 진화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고 있다. AI를 R&D 체계의 전략적 신경망으로 어떻게 내재화할 것인가? 한정된 자원의 배분과 의사결정 구조를 AI 기반의 지능으로 어떻게 재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국가적 고민이 절실하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지각변동은 기술 자체의 격차보다, AI를 활용해 국가를 변혁하는 체제 지능화의 속도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길 수 있는 체제’는 다음 세 가지를 동시에 설계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첫째, 죽음의 계곡을 돌파할 ARPA 같은 혁신 조직의 창설이다. 둘째, AI를 R&D 신경망에 이식하는 지능형 체제의 확립이다. 셋째, 관료적 행정 문법 바깥에서 연구와 혁신의 자율성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혁신 친화적 제도의 도입이다. 그동안 한국은 남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달리는 추격형 체제의 강자였다. 목적지가 선명할 때는 그 공식이 유효했다. 그러나 앞서가는 길잡이가 사라진 전장에서 생존하는 법은 단 하나, 스스로 길을 내는 것이다. 승부처는 개별 기술의 우위를 넘어 기술이 승리할 체제의 설계에 있다. 이 설계도가 대한민국 기술패권의 수명을 결정한다.

홍성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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