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타임머신] 딥 블루 대 카스파로프

1997년 5월 11일 미국 뉴욕. 수많은 현장 관객과 TV 중계 앞에서 가리 카스파로프(Gary Kasparov)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16년간 세계 챔피언 자리를 지킨 사나이, 체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꼽히는 러시아의 그랜드마스터는, 그 누구보다 까다로운 적수를 마주하고 있었다. 체스에 특화된 IBM의 수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가 바로 그 상대방이었다.
그는 이미 1996년에 딥 블루를 3승 2무 1패로 이긴 바 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싸움이었다. 이듬해 다시 맞붙은 딥 블루는 달랐다. 팽팽하게 이어진 승부는 1승 3무 1패로 비기고 있었고, 마지막 여섯 번째 대국은 딥 블루가 백으로 선수를 잡은 상황이었다. 카스파로프는 ‘카로-칸 디펜스’로 승부수를 던졌지만 딥 블루는 나이트를 희생하며 상대방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경기 초반, 고작 19수 만에 카스파로프는 항복했다.

온 인류가 충격을 받았다. 카스파로프 본인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경기가 끝난 직후 딥 블루의 몇몇 수가 ‘너무 인간적’이라고 지적하며 다른 그랜드마스터가 훈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을 정도였다. 그는 오래도록 패배를 곱씹었다. “매우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기계에 맞서 인류를 대표하고 있었는데 지고 만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카스파로프의 패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금은 모든 스마트폰이 딥 블루보다 강력하다. ‘인간 지능의 최후 보루’처럼 여겨졌던 바둑마저 2016년 3월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고가 한국의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AI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심지어 작곡까지 척척 해내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1997년에는 저주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특별한 사건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2024년 카스파로프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바로 그 ‘특별한 사건’ 속에 살아가고 있다. 더 진지하고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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