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시대 변기 보고 '빵' 터진 이유, 보시면 압니다

정재학 2026. 5. 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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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아리의 거룩한 장도] 무령왕릉 신수문경과 백제금동대향로, 그리고 호자

박물관 학예연구사이자 20여 년 동안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탐방해 온 문화유산 전문 여행 작가입니다. '거룩한 장도, 한국 호랑이를 찾아서'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룹니다. <기자말>

[정재학 기자]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것은 단순히 말을 적고 서로 소통하는 도구만이 아니라 기억과 문명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확장시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우리도 한자의 도입으로 일찍이 역사 기록을 했다고 하지만, 불행히 전해진 바가 없고 현재까지 삼국사기가 그 시초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래서 삼국사기 등 이 시기 역사서에서 호랑이 관련 기록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기록이 모두 관점이 달라 신기했다. 고구려는 북방 수렵 문화의 반영으로 전사의 상징이나 왕권과 군사의 비유로 인용되는 사례가 많았던 반면, 신라의 경우 기록의 횟수나 내용 면에서 방대하기도 하고 비교적 호환이나 국가 재난 등 사실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에 비해 백제의 기록을 살펴본 결과 호랑이를 대부분 암시적 표현으로 언급하고 있는 듯 했다.

몇 가지 기록을 보면, 온조왕 13년에 "다섯 마리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라 하고 동성왕 23년에는 "남산에 호랑이 2마리(가) 성에 들어왔다"라 한다. 그런데 여기서 호랑이는 실제 맹수 호랑이라기보다는 정치적 분란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읽힌다. 백제의 호랑이 관련 유물들은 어떤 것들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지난 3일과 6일에 충남 공주로 탐방을 떠났다.

생생한 기억 안고 찾은 공주
▲ 송산리 6호분 벽돌로 쌓은 중국 남조 양식의 무덤
ⓒ 정재학
먼저 지금은 공주무령왕릉과 왕릉원인 송산리고분군을 찾았다. 이곳은 개인적으로 직장 첫 발령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이젠 정비도 많이 되고 여러 시설들의 새 단장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지만 그래도 당시의 추억으로 인해 낯설지 않았다. 친정에 온 것처럼 푸근했다. 당시 숙직하면서 어두컴컴한 밤에 고분군을 순찰해야 했던 아찔한 순간과 새벽녘 고즈넉한 풍광 등은 어제의 일 같지 않았다. 그리고 담당자로서 점검차 실제 고분 내부에 들어갔던 기억도 생생했다.
호랑이와 관련된 유적은 송산리 6호분이다. 이 고분은 벽돌로 쌓은 중국 남조 양식의 무덤인데, 묘방 사방에 사신 벽화가 그려져 있다. 지금은 직접 볼 수 없지만 재현해 놓은 모형 묘실 서쪽 벽면 단면도를 보면 알 수 있다.
▲ 송산리 6호분 백호 벽화 지금은 윤곽선만 남아 있고 세부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 정재학
현재는 백호의 윤곽선만 남아 있고 그 세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 백호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무령왕릉에는 벽화가 없다. 연꽃문양 벽돌로 둘러싸여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호랑이 문양은 없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무령왕릉 호랑이 문양을 찾아 서둘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중 중요 문양은 단연코 용이다. 당시 왕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통 용과 봉황 문양 일색인 것이다. 그 속에서 호랑이 문양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청동거울 속에서 겨우 호랑이를 찾을 수 있었다. 무령왕릉에서는 총 3점의 청동거울이 수습되었는데, 2점은 왕 자리에서, 1점은 왕비 자리에서 나왔다. 호랑이 문양의 거울은 왕의 다리 왼쪽 부근으로 출토되었다.
▲ 무령왕릉 신수문경 방격규구신수문경으로 왕의 다리 왼쪽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 정재학
▲ 신수문경 호랑이 두 앞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듯한 모습이 흥미롭다.
ⓒ 정재학
바로 '방격규구신수문경'이다. 명칭도 참 어렵다. 거울걸이를 중심으로 사각의 구획(방격)이 있고, 길이, 지름 등을 재는 도구(규구)가 있고, 그 주위에 신령한 짐승(신수) 문양이 새겨진 거울(문경)이라는 의미다.

다른 것들은 다 차치하고 동물들에 주목해 보자. 고구려 고분벽화 씨름도에 나온 듯한 상투 틀고 삼각 속옷을 입은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호랑이, 사슴, 개, 신령한 서수 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도는 도상이다.

창을 든 사람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대상이 바로 호랑이다. 저 호랑이 자세를 보라. 마치 두 앞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듯한 모습이 흥미롭다. 호랑이와의 대결은 용맹한 전사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예식진 묘지석과 덮개 그는 의자왕 시절 나당연합군에 투항해 당에서 고관까지 오르고 죽은 백제장군
ⓒ 정재학
▲ 묘지석 호랑이 무서운 맹수의 모습도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모습도 아니다.
ⓒ 정재학
흥분도 잠시, 2층 역사문화실에서 뜻밖의 유물을 만나게 되었다. 예식진 묘지석 탁본이었다. 그는 의자왕 시절 백제 장군으로 나당연합군의 침입 당시 투항해 당나라로 건너가 정3품 대장군에 오르고 죽은 인물로, 그의 묘지석과 덮개다. 이 묘지석 주위로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인(寅)'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 호랑이는 무서운 맹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또한 권위적이거나 위압적인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다. 호랑이를 대하는 관점이 바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백제의 호랑이를 찾아서

다음 여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 부여다. 공주를 떠나 부여로 향하는 길, 갑자기 백제 성왕이 생각났다. 부왕인 무령왕과 어머니인 무령왕비의 국장을 연달아 치르고도 부여로 천도를 감행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옥천 관산성 전투에서 고투하고 있는 아들 창을 응원하려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허무하게 죽게 된 기막힌 사연들을 알고는 있는지 금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 능산리사지 전경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능사
ⓒ 정재학
▲ 백제대향로 출토 공방지 백제 멸망 시절에 급히 이곳에 숨긴 것으로 보인다.
ⓒ 정재학
그 성왕과 관련된 유적이 바로 이곳 능산리사지다. 아들 위덕왕 창 입장에서 얼마나 원통 했겠는가. 이 비통함이 무엇을 한들 해소되었을까. 그래서 탄생한 걸작이 백제금동대향로다. 아마 정성을 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장인으로 하여금 그전까지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향로를 만들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져 능사에서 추모하던 이 귀한 향로가 왜 공방터 진흙뻘에서 발견된 것일까. 나라의 멸망 앞에서 급히 이 향로를 숨긴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능산리사지 향로 출토지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 능산리 동하총 무덤 묘실 안에 사신도 벽화가 남아 있다.
ⓒ 정재학
▲ 동하총 내부 백호 모습 고구려의 것에 비해 훨씬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
ⓒ 정재학
아차차. 호랑이를 찾아야지. 이곳 부여왕릉원에 온 목적은 따로 있는데 본분을 잠시 잊고 있었다. 능산리고분군은 현재 7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신도가 남아 있는 곳은 남동쪽에 있는 동하총 굴식돌방무덤이다. 이곳 백호는 고구려 것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고구려의 것이 강렬하고 긴장감이 넘치며 위압적이라면, 여기의 모습은 훨씬 부드럽고 우아한 자태였다. 백제만의 귀족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진일보한 감이 들었다.

잠시 군수리사지를 둘러본 뒤,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금동대향로 앞에 섰다. 최근 신축한 백제대향로관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사실 첫 번째 방문은 일요일이었는데 밀려 드는 인파로 도저히 관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람객이 드문 평일 시간을 내서 다시 방문했다. 그제야 조금 여유롭게 관찰할 수 있었다.

이 향로는 너무도 유명하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본 목적이 호랑이기 때문에 이 점에 집중해서 관찰했다. 호랑이 문양으로 추정되는 도상은 3개로 보고되고 있는데, 신선세계 상상의 동물과 혼재되어 확답하기가 좀 어렵다.
▲ 백제대향로 궁사와 호랑이 말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식 활쏘는 궁사와 사선에 위치한 호랑이가 대치하고 모습이 인상적이다.
ⓒ 정재학
▲ 백제대향로의 호랑이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이 흥미롭다.
ⓒ 정재학
하지만 호랑이라 할만한 도상도 있었다. 그것은 상부 뚜껑 봉황 후면 우측면 하단에 있었다. 그 사선 방향에는 말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식 활쏘기를 하는 궁사가 있었다. 그가 쏘는 활 시위 방향으로 뛰어오르고 있는 호랑이가 보인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에서 보이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아 신기했다.

예사롭지 않은 '호자'의 모습

하지만 주인공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법이 아닌가. 백제 호랑이는 단연 '호자'다. 호자는 호랑이 형상을 본뜬 휴대용 남성 소변기다. 궁남지 근처 군수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귀족층의 생활용품 혹은 장례용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중국 청자 호자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토기로 만든 이 호자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몸통은 둥글고 고개를 좌로 틀어 포효하는 모습이다. 입구 상부를 보니 손으로 대충 눌러 만든 눈두덩이와 콧구멍도 나무로 콕 찍어 만든 듯한 모습에 '빵' 터졌다. 또한 발 모습은 어떤가. 짤뚱하지만 듬직한 자태다. 그런데 압권은 손잡이 부분이다. 조각칼로 예리하게 도려낸 '엣지'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참으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이 작품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 호자 궁남지 근처 군수리에서 출토되었다.
ⓒ 정재학
▲ 호자 눈두덩이 손으로 대충 눌러 만든 눈두덩이
ⓒ 정재학
▲ 호자 손잡이 조각칼로 예리하게 도려내 엣지 있는 모습이 인상깊다.
ⓒ 정재학
이렇듯, 백제인들은 호랑이를 그들만의 미감으로 재해석하고 예술로 승화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들에게 호랑이는 더 이상 무섭고 맹렬한 맹수가 아니었다. 기록과 실물은 서로를 증명한다. 문헌 속 짧은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던 백제인의 정신 세계가 유물을 통해 살아난다.

무덤은 죽음을 위한 공간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삶의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그 실물 속에서 호랑이는 백제인의 미 의식을 품고 있었다. 결국 백제 무덤 속 호랑이는 맹수의 형상이 아니라, 인간이 끝내 잊고 싶지 않았던 세계의 상징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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