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손맛 내는 식당처럼”… 소중한 영혼의 피난처 되다

김용현 2026. 5. 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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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화 은혜의열매교회 목사 환갑 앞두고 작은 교회 세운 이유
주종화 목사가 최근 경기도 화성 은혜의열매교회에서 개척 목회의 비전을 설명하고 있다.


25년 전 세례를 끝으로 교회를 떠났던 이가 다시 예배당 문을 열었다. 출석하던 교회에 실망해 7~8년간 신앙을 멈추고 방황하던 청년도 이곳에 정을 붙였다. 그 청년의 변화를 곁에서 지켜보던 친구 역시 스스로 교회를 찾아왔다.

상처 입은 이들이 숨을 고르는 공간은 경기도 화성 봉담지구 한 상가 5층 구석에 자리한 은혜의열매교회(주종화 목사)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교회 출석 교인은 20명 남짓. 작은 피난처를 이끄는 주종화(60) 목사의 이력도 특별하다. 2015년 여름 해병대 공보실장(대령)을 끝으로 31년 군 생활을 마쳤다. 만 50세에 신학을 시작해 환갑을 앞두고 상가에 작은 강단을 세웠다. 아침저녁으로 진통제를 삼키며 9년째 통증과 함께 살고 있다. 최근 교회에서 만난 주 목사는 “교회가 넘쳐나도 정작 갈 교회가 없다고 느끼는 한 영혼이 늘 어딘가 있었다”며 “그리운 사람의 손맛을 내는 식당을 찾기 어려운 것처럼 작은 교회는 그래서 소중하다”고 말했다.

해병대 안의 크리스천 장교
2010년 현장공보반장(중령)으로 복무하던 주종화(왼쪽) 목사가 인천 옹진 연평도에서 현장 수행을 하고 있다. 교회 제공

1984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주 목사는 해병대에 자원했다. 사관학교 동기 151명 중 해병대 군복을 입은 이는 35명. 훗날 그중 네 명이 장로가 됐다. 거친 군대에서 크리스천 장교로 산다는 것은 부딪힘의 연속이었다. 회식과 술자리, 수직적인 선후배 관계가 매번 시험대였다.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일은 확실하게 해낸다. 그리고 신앙의 색깔은 처음부터 분명히 밝힌다.

“3개월 안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처음엔 거부감도 보이고 핑계 댄다고 오해하죠. 하지만 일에 신뢰가 쌓이면 상관들이 먼저 챙깁니다. ‘너 교회 갈 시간 아니냐’고요.”


공보과장 시절에도 일주일씩 휴가를 내고 동남아 단기선교를 떠났다. 장군 참모가 후원금을 보태기도 했다. 그가 가장 마음을 쓴 대상은 갓 입대한 청년들이었다. 부모의 신앙에서 자신의 신앙으로 독립해야 할 시기, 흔들리는 청년들에게 그는 단단한 ‘지지목’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입대를 앞둔 청년들을 위한 안내서 ‘크리스천 청년들의 군대 톡톡’(생명의말씀사) 출간으로 이어졌다. 98년부터 15년간 이어온 민간 교회 청년부 전도사 사역에서도 사례비를 받은 적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의 한 줄로 시작

주 목사가 사관학교 합격 통보를 받은 직후였다. 전북 전주의 낡은 버스 정류장 비닐 천막에 적힌 글귀 하나가 축구만 좋아하던 소년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사관학교 4년의 신앙은 이후 해병대 군 생활을 버티게 한 닻이 됐다.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처음 직감한 건 95년 국방대학원 시절이었다. 동기의 부탁으로 한 신학교 교수의 원고를 타이핑해주던 중 “사명이 있는 것 같으니 기도해 보라”는 말을 들었다. 그 한마디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97년 12월 그는 일주일 휴가를 내고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들어갔다. 마지막 날 새벽 선잠 속에서 두 장의 성경이 펼쳐지는 꿈을 꿨다. 깨자마자 성경을 펼쳤고, 이사야 52장 7절에서 멈췄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같은 구절이 꿈속 로마서 10장 15절에 그대로 인용돼 있었다. 두 번째 응답은 이사야서 같은 장 11~12절에서 이어졌다. “너희가 황급히 나오지 아니하며 도망하듯 다니지 아니하리니.” 안주하지 않되 도망치듯 서둘러 가지도 않겠다는 다짐이 그날 섰다.

응답 이후의 기다림은 길었다. 신대원 1차 낙방, 합격 후엔 부대의 전역 거부로 자퇴. 면담한 사령관이 끝내 전역 결재 서류를 덮어버린 적도 있었다. 전역 서류에 도장이 찍힌 것은 2015년 여름. 그해 가을 만 50세에 총신대 신대원에 입학했다. 기도원에서 응답을 받은 지 18년이 흐른 뒤였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정확한 때에 인도하셨고 그저 제 마음만 조급했던 거지요.”

21평 상가, 다시 모여든 영혼들
지난 2월 열린 첫 세례식에서 한 여성 성도에게 세례 증서를 전달하며 축하하고 있는 주 목사. 교회 제공

신대원 졸업과 부교역자 생활을 거쳐 2024년 10월 화성의 상가 5층에 21평 남짓의 작은 교회를 개척했다. 시간이 흐르자 주 목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알음알음 모여들었다. 매주 주일 아침 휠체어를 타고 예배당을 찾는 한 성도는 전날 저녁부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행여 화장실 가는 일로 예배에 지장을 줄까 봐서다. 그 옆에는 교회 마스코트가 된 14살 노견 ‘뽀기’가 조용히 엎드려 있다.

은혜의열매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의 교회 설립 요건인 세례교인 15명을 채웠고 지난 2월 첫 세례식도 치렀다. 주방이 없었기에 사모는 1년 넘게 집에서 밥을 지어 직접 날랐다. 성도들이 주일 식사를 번갈아 맡기 시작한 건 올해 3월부터다. 전기밥솥을 두 개로 늘리던 날 주 목사는 “그게 그렇게 기쁘고 벅찼다”고 했다.

일본 단기선교 중 한 시골 마을 요양원을 방문해 어르신들 앞에서 특별 찬양을 선보이고 있는 교회 성도들. 교회 제공


교회 규모는 작아도 시선은 밖을 향한다. 개척 과정에서도 기존 선교지 후원금을 도리어 늘렸다. 태국 치앙마이, 캄보디아, 일본의 개척교회가 이 작은 상가 교회와 연결돼 있다. 올해 3월에는 성도들과 일본 시골 마을로 단기선교를 다녀와 상처를 안고 이주한 한국 어머니들의 손을 잡았다. 국내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다문화 가정을 찾아가 교인들이 함께 집을 청소했다.

교회 운영을 들여다보면 31년 군 생활의 뼈대가 엿보인다. 투명성과 시스템이다. 그는 개척 1년 만에 재정 결재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군과 대기업 출신 성도 5명으로 운영위원회를 꾸려 모든 결정을 일임했다.

국내 거주하는 다문화 가정을 찾아 청소 봉사를 하는 주목사와 성도들. 교회 제공


“얼음 정수기를 아내 명의로 카드 할인을 받아 들여놓으려 했지만 위원회가 ‘비싸더라도 교회 명의로 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어 한 달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처음엔 답답했지만 곧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투명하게 세우려면 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성도들이 스스로 ‘이곳이 진짜 내 교회다’고 느끼게 되니까요.”

개척 직후 홈택스 전자기부금영수증 시스템도 등록해 성도들이 헌금 내역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한국교회의 절대다수가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입니다. 담임목사가 은퇴하면 공중분해 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작은 교회일수록 시스템으로 든든히 버텨야 합니다.”

도서관서 쓴 원고, 매일의 진통제

부교역자 시절 사역지가 없어 매일 도서관으로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간 동안 10년 넘게 묵혀두었던 원고를 갈무리해 지난해 ‘복음서를 읽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다’(죠이북스)를 냈다. 사복음서의 124장면을 시간순으로 엮었다. 첫 수익금 207만원은 전액 선교비로 흘려보냈다.

주 목사는 매일 아침과 저녁 진통제 두 알로 하루를 버틴다. 디스크 수술 후유증에 하지정맥류까지 겹쳤다. “여주대 특임교수 시절 숙소 창고 같은 방에서 ‘하나님, 저를 빨리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세 번이나 진지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통증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게 감당이 안 됐거든요.”

가시 같은 통증이 그에게 가르친 것은 겸손과 일상의 은혜다. 뻣뻣했던 장교 시절엔 보이지 않던 휠체어 탄 성도의 절박함이 허리가 무너지고 나서야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주차장에서 짧은 걸음을 옮기는 동안 잠시 통증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내 일상에 스며있던 은혜를 그동안 놓치고 살았구나 깨달았죠.”

그래서 그는 날마다 ‘하루치만 살자’는 다짐으로 걷는다. “세상은 가성비를 따지지만 우리는 그런 거 없습니다. 단 한 영혼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이 작은 교회의 역할은 이미 그걸로 다 한 거니까요.”

화성=글·사진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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