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덮친 '삼전·닉스 신드롬'... 의치대 인기까지 흔든다
[서부원 기자]
돈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사는 요지경 세상이라지만, 요즘처럼 '노골적인' 시절이 또 있었나 싶다. 예전엔 '돈 밝히는' 걸 부끄럽게 여겼지만, 요즘엔 솔직하다거나 '쿨하다'는 인상을 준다. 되레 그걸 흉보는 사람을 향해 혼자 고결한 척한다며 마뜩잖은 시선을 보낸다.
교실 안이라고 다를 바 없다. 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도 태반이 돈 이야기다. 요즘 그들에게도 연일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는 주식 이야기가 단연 화제다. 그들 입에서조차 '삼전(삼성전자)'과 '닉스(SK하이닉스)'라는 기업의 이름이 무시로 튀어나오고 있다.
이른바 '자본주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주식을 주제로 공부하는 거라면 좋으련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들을 수 없다. 애초 시장경제의 원리나 기업 경영, 주식의 역할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주식 투자를 통해 큰돈을 벌 수 있느냐 여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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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실에서는 요즘 연일 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는 주식 이야기가 단연 화제다. 그들 입에서조차 '삼전(삼성전자)'과 '닉스(SK하이닉스)'라는 기업의 이름이 무시로 튀어나오고 있다. |
| ⓒ AI 생성 이미지 |
하루아침에 대학의 반도체 관련 계약학과가 의치대 부럽잖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듣자니까, 의치대 진학을 위해 'N수'를 불사하려던 공대 재학생들이 멈칫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교실에서도 콕 찍어 '삼전'과 '닉스' 취업을 목표로 내건 아이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이러다 학교마다 '삼전'과 '닉스' 취업 관련 동아리가 생겨날 판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있다. 동아리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과 선택도 미래의 '전망'이 유일한 기준이 됐다. 전국 모든 학교의 최상위권이 예외 없이 의치대를 지망하는 것도 그래서다. 전망은 '돈벌이'와 동의어다.
예전엔 눈앞의 대입 전형에서 유불리만 따졌다면, 지금은 대학 졸업 후 취업 시장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는 현실에서 대학의 세부 전공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아이들도 잘 안다. 대학엔 의치대와 비(非)의치대 둘뿐이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나온다.
이 와중에 삼전과 닉스 직원들이 돈벼락을 맞았다는 소식에 반도체 관련 학과가 의치대에 도전장을 내민 상황이 펼쳐졌다. 공대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될 거라는 섣부른 전망마저 내놓고 있다. 그들과 의사 중에 누가 더 돈을 많이 버는지를 두고 때아닌 논쟁까지 벌어진다.
돈이 학교 교육을 흔들고 있다. 한때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절 학교에는 경제 관련 동아리가 생겨났다. 간판만 '실물 경제'를 내걸었을 뿐, 아이들끼리 부동산 투자와 관련해 공부하는 곳이었다. 개인적으로 'PF(프로젝트 파이낸싱)'라는 용어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런 동아리들은 한두 해 반짝한 뒤 사라졌고, 당시 사회 전체는 이른바 '부동산 불패 신화'에 휩싸여 있었다. 이후 의치대 진학의 열풍 속에 생명과학 관련 동아리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억대 수입을 내는 유튜버들이 화제가 되자 유튜브 제작 관련 동아리가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적성과 취미가 같아서 모이고 활동한다는 동아리조차 선택 기준이 미래 돈벌이에 보탬이 되느냐로 획일화하는 추세다. 학술 동아리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고, 독서 클럽은 유명무실해졌으며, 문전성시이던 스포츠 동아리도 축구와 야구 외엔 없다. 불과 한두 해 전 '블루칩'이라 불리던 코딩 관련 동아리도 AI의 등장과 함께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동아리가 이럴진대, 교과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도입 이후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사라졌지만, '이과에 의한 문과의 흡수 통합'으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정시 전형의 비중이 급격히 낮아지는 상황에서 문과 과목은 종국에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키 어렵다.
'문송합니다'를 넘어선 현실
애초 문·이과 구분의 폐지는 대입 전형에서 응시 과목의 제한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전격 시행됐다. 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 두 계열의 벽을 허물어 전인교육을 실현한다는 목표는 사실상 허울뿐이었다. 지난해 수능에서 사회적 이슈가 된 이른바 '사탐런'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이젠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를 넘어 아이들 사이에서 '문과 딸배'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대학에서 인문 사회 계열을 전공하면, 졸업 후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곤 오토바이 배달뿐이라는 자조적 표현이다. '딸배'는 배달이라는 단어를 앞뒤로 뒤집어 부르는 멸칭이다.
교육과정상 공통 필수 이수 교과와 학교별 지정 교과라는 '안전장치'마저 없다면, 학교에서 문과 과목은 개설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른바 '학생 선택 중심'이라는 현행 교육과정에선 아이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폐강을 피할 수 없다. 문과 과목은 '퇴출 0순위'다.
돈이 대학과 전공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 된 현실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됐다. 몇 해 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의치대 열풍에다 최근 '삼전'과 '닉스'의 천문학적 성과급 소식에 애먼 문과 과목이 또다시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이젠 아예 '동네북' 신세다.
언젠가 '10억 원만 준다면 기꺼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들의 덤덤한 반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사회적 반향이 엄청났지만, 지금은 더욱더 강퍅해졌다. 요즘 아이들은 5억 원만 줘도 감옥에 가겠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마치 경매하듯 3억 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한 아이는 성인이 돼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로또를 사는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로또 외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곳'으로 여긴다며, 또래 친구들의 대화 분위기를 전했다.
교육은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돈은 최근 빈번하게 일어나는 학교폭력의 원인 중의 하나다. 사이버 도박에 연루된 경우가 허다하고, 심지어 아이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도 벌어진다. 도박 빚의 규모도 만만치 않아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많게는 몇백만 원을 훌쩍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학칙상 학교 내에서 이뤄지는 금전 거래는 모두 불법이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채의 이자까지 요구하는 일이 버젓하다. 기한 내에 갚지 않으면 노예 삼는다는 내용의 황당한 계약서까지 작성하는 경우마저 있다. 신고되지 않은 음성적인 돈거래에 학교는 속수무책이다.
요즘 아이들은 가난하면 대놓고 무시당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걸 의심 없이 믿고 있다. 수중에 돈이 없으면 친구도 사귈 수 없고, 덩달아 자신감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종일 불안하고 우울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일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가장 즐거운 일이 돈을 마음껏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돈이라고 했고, 가장 비참한 게 돈이 없어 '집콕'하는 거라고 답했다. 그들에겐 돈이 세상의 전부인 듯했다.
사족. 누군가 내게 교육을 정의해보라고 하면,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이렇게 답한다. 가난할지언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며, 적게 갖고 많이 존재하는 삶을 실천하는 거라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그저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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