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청주에서 저상버스를 타지 못 할까
[박혜현 기자]
나는 저상버스를 타본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익숙하게.
프랑스 파리에서 보낸 시간 동안, 버스를 타는 행위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정류장에 서 있으면, 기사는 멀리서부터 나를 확인하고 차체를 인도 쪽으로 낮추는 '닐링(Kneeling)' 시스템을 가동했다. 이어지는 리프트의 기계음은 도시가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환대의 신호였다. 그곳에서 나는 누군가의 일상을 방해하는 '예외적 불청객'이 아니라, 정당한 요금을 지불하고 목적지로 향하는 평범한 '승객'일 뿐이었다.
서울에서도 그 감각은 어느 정도 유효했다. 물론 모든 정류장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인 공포는 없었다. 한 대의 버스를 놓치더라도 10분 뒤면 다음 저상버스가 온다는 '확실성', 그리고 버스가 여의치 않으면 인근 지하철역으로 이동해 경로를 수정할 수 있는 '대체 가능성'이 나를 지탱했다. 그 도시들에서 이동권은 추상적인 인권 선언이 아니라, 내 삶의 반경을 결정하는 단단한 물리적 토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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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청주에서는 버스를 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타지 못하는' 환경에 완벽히 길들여졌다. AI생성 이미지 |
| ⓒ 오마이뉴스 |
"여긴 중소도시라 자차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나 역시 차량을 개조해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사람들은 나의 운전석을 보며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삶"이라 칭송하지만, 사실 이 운전석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공공 시스템이 나를 도로 위로 밀어내며 강요한, 유일한 생존 창구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청주시의 저상버스 도입률이 확대되었다는 통계를 근거로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통계는 언제나 현장의 진실을 교묘하게 가린다. 저상버스의 총량이 늘어났다는 사실과, 휠체어 이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지난 2022년 기준, 충북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청주 시내버스 483대 중 저상버스가 125대(25.9%)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여전히 도로 여건이나 수익성을 이유로 저상버스가 투입되지 않는 '예외 노선'들이 존재하며, 그 노선 위에서 나의 이동권은 행정적 편의에 의해 손쉽게 삭제된다. 통계상의 숫자 뒤에서 나의 일상은 여전히 '이동 불능'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인프라의 배신: 하드웨어만 있고 소프트웨어는 없는 도시
설령 운 좋게 저상버스를 마주한다 해도, 또 다른 거대한 장벽이 나를 막아선다. 바로 정류장 인프라와 운영 매뉴얼의 부재다. 저상버스는 단순히 차체가 낮다고 해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버스가 보도에 밀착할 수 있는 공간, 보도의 높이, 그리고 리프트를 펼칠 수 있는 유효폭이 정교하게 맞물려야 비로소 '작동'한다. 하지만 청주의 수많은 정류장은 여전히 고상버스를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거나, 무분별한 가로수 배치와 불법 주정차 차량으로 인해 리프트를 펼칠 최소한의 공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기사의 숙련도와 인식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리프트 작동법이 서툴거나, 승하차를 돕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난감한 기색을 표하는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휠체어 이용자는 깊은 위축감을 느낀다. 나 때문에 지연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다른 승객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일은, 이동을 권리가 아닌 '민폐'로 여기게 만든다. 결국 물리적 인프라의 미비와 사회적 인식의 부재 속에서 저상버스는 그저 '계단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연'과 '중단'의 차이: 사회적 비용의 외주화
이 지점에서 대도시와 중소도시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이동권의 핵심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연결성'과 '예측 가능성'에 있다. 서울에서의 승차 실패는 '지연'에 가깝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이라는 강력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주에서는 한 번의 승차 실패가 곧 삶의 '중단'으로 이어진다. 배차 간격은 길고, 대체 노선은 전무하며, 인근 정류장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장애물이 되는 환경에서 휠체어 이용자의 계획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진다.
이 거대한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나는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차량을 구매하고, 휠체어에 맞춰 개조하고, 직접 운전대를 잡는다. 이것을 과연 자발적 '선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국가와 지자체가 공공 서비스로서 감당해야 할 이동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긴 '사회적 비용의 외주화'다. 공공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도시에서, 장애인은 가장 먼저 비싼 비용을 치르며 공적 영역에서 퇴출당하고 있다.
결론: 이동이 '용기'가 되지 않는 도시를 요구한다
이동권은 '운이 좋으면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보장되어야 하는 '확실성'이어야 한다. 탈 수도 있고 못 탈 수도 있는 버스는 공공 서비스라 부를 자격이 없다. 청주시가 진정으로 포용적인 도시를 지향한다면, 단순히 저상버스 보급 대수라는 숫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노선에 대한 저상버스 의무화, 정류장 환경의 전수조사 및 정비, 그리고 무엇보다 장애인을 '예외'가 아닌 '보편적 이용자'로 전제하는 설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나는 왜 청주에서 저상버스를 타지 못할까. 그 답은 내 신체의 불편함에 있지 않다. 나를 시민으로 계산하지 않은 이 도시의 설계도에 있다. 누군가에게 이동이 매번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 '용기'와 '운'의 영역이라면, 그 사회의 권리는 아직 미완성된 상태다.
이제는 용기 없이도 버스에 오를 수 있는 도시, 나의 이동이 누구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지 않는 청주를 요구한다. 그것이 내가 오늘도 이 글을 쓰고, 다시 운전대를 잡으며, 끝내 버스 정류장을 응시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이 글은 단순히 '불편함'을 호소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이동'이라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수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생존권'임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저의 운전석은 독립의 상징이 아니라, 공공 시스템이 포기한 책임을 오롯이 개인이 짊어진 흔적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오늘 버스 정류장을 지날 때, 휠체어가 멈춰 설 공간과 리프트가 내려올 자리를 한 번만이라도 상상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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