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이스라엘을 해석한다

2026. 5. 7.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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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온 소울 하비스트 운동]
통합적 종말론의 절박한 필요성
지난해 6월 24일 예루살렘 근교에서 개최된 ‘이스라엘-코리아 빌리온소울하비스트 대회’장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Messianic Jew)이 위대한 회복(Great Return), 위대한 추수(Great Harvest), 위대한 돌파(Great Breakthrough)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황성주 원장 제공


최근 해밀리로 이름을 바꾼 사랑의공동체 안에는 거의 40년 가까이 함께해 온 자매가 있다. 지금 그는 남편과 함께 이스라엘에서 중보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는 사역자로 서 있다. 그가 왜 말끝마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말했는지 필자는 최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역사의 끝을 바라보며 영성의 상아탑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과 열방을 품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 서 있었다.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5~26)의 말씀을 붙잡고 그는 세계 선교의 시대적 흐름과 하나님의 경륜을 읽고 있었다.

최근 이란을 둘러싼 긴장과 충돌이 고조되면서 종말과 이스라엘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범람하고 있다. 일부는 특정 사건을 성경 예언의 직접적 성취로 단정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를 국제 정치의 한 국면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이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듯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다. 사건이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요구한다. 성경으로 사건을 해석하라. 이것이 믿음의 질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본문을 약화시키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와 같은 혼란의 배경에는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하나의 결정적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국제 정치의 변수가 아니라, 성경 해석의 틀 자체를 흔든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오랜 세월 교회는 이스라엘을 영적 의미로만 이해하고 모든 약속이 이방 교회 안에서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민족 국가로 재등장하면서, 성경의 약속이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도 성취되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순간에 태어나겠느냐.”(사 66:8) 이 과정에서 그동안 상대적으로 약화돼 있던 전천년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의 복음화, 그리스도의 재림, 그리고 천년왕국의 가시적 통치가 문자적으로 현실 역사 속에 연결되고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국 48년의 충격적인 사건은 성경 해석을 다시 성경으로 돌이키게 만드는 하나님의 흔드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하나의 관점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특정 체계를 절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계시를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인가

성경은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을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주님은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 11:21,24)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믿음의 원조임을 다시 선언하셨다. 로마서 11장은 하나님의 경륜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뿌리요 이방은 접붙임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품고 세우고 연결하신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이스라엘은 폐기된 존재가 아니라 구속사의 완성으로 향하는 중심적 존재이다.

이 기준이 바로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이스라엘과 세계사의 흐름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읽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질서의 전개이다. 그 질서는 반복되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항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리듬(Holy Rhythm)이다. 이 리듬은 하나님의 경륜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리듬의 중심에는 결국 이스라엘이 있다. 아브라함의 선택은 은혜의 시작이며, 출애굽은 구원의 선언이고, 광야는 훈련이며, 포로는 심판이고, 귀환은 회복의 전조이다. 이 흐름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 11:26)는 말씀에서 이스라엘은 실패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리듬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의 중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특별한 경륜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은 때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11:30~31)는 말씀을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심장인 긍휼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신다.

통합적 종말론, 왜 지금 절박한가

한국 기독교인과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서로 축복하며 기도하는 모습. 황성주 원장 제공

오늘날 교회 안에는 두 가지 흐름이 공존한다. 과도한 종말론과 종말론의 부재이다. 어떤 이는 모든 사건을 종말과 연결하며 긴장을 증폭시키고, 어떤 이는 종말 자체에 대해 입을 다물고 현재의 삶에만 머문다. 이 두 흐름의 결과는 동일하다. 깨어 있음이 사라진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마 25:13) 종말론의 목적은 미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깨우는 데 있다. 종말론은 정보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영적 나침반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말론이 아니라 통합적 종말론이다. 이는 한국교회 종말론의 대가인 이광복 목사(흰돌국제선교센터)가 필생의 과업으로 추구하는 비전이기도 하다. 통합적 종말론은 서로 다른 입장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다. 각 입장이 가진 통찰을 인정하고 본질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다.

종말론은 오랜 세월 다양한 해석 속에서 전개됐다. 전천년 무천년 후천년이라는 서로 다른 관점은 긴장과 대립을 만들었다. 임박한 재림을 직시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논쟁거리로 만드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필자의 경우 이런 논쟁이 벌어지면 ‘누가 옳은지 때가 되면 안다. 다만 끝이 오는 것은 확실하니 열심히 복음을 전하라’고 권면한다. 잠자는 교회를 깨워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소모적 논쟁이 본질을 가리고 있다. ‘언제’와 ‘어떻게’에 대한 집착이 “깨어 있으라”는 핵심 명령을 흐리고 있다. 종말론은 미래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영적 각성의 부르심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고도의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이런 논쟁을 종식시키려면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결국 종말론의 모든 흐름은 한 지점에서 만난다. 각 종말론의 공통된 고백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완성된다’ ‘심판은 반드시 있다’ ‘악은 제거되고 반드시 승리한다’ ‘몸된 교회는 그 어린 양의 신부로 완성된다.’ 이것은 모두가 100% 인정하는 성경 계시의 핵심이다. 전천년 관점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재림의 실제성을 강하게 강조한다. 이 관점은 우리에게 종말의 현실성과 긴장감을 회복시킨다.

무천년 관점은 지금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강조한다. 현재 삶 속에서의 거룩성과 지금 살아내야 할 신앙의 깊이를 제공한다. 후천년 관점은 복음의 확장성과 역사 속 영향력을 강조한다. 이 관점은 우리에게 선교적 사명과 문화변혁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전천년은 긴장을 준다. 무천년은 깊이를 준다. 후천년은 확장을 준다. 이 세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균형 잡힌 성경적 신앙을 회복하게 되며 교회는 비로소 깨어 있는 공동체가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리듬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혼돈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이며 리듬이다. 이 리듬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이며, 반복되지만 항상 더 깊은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선택 → 언약 → 실패 → 심판 → 회복 → 통치 → 완성으로 흐르는 구속사의 구조이다. 이스라엘은 이 리듬의 중심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선언은 예측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정이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은 과거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진행 중인 구조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묻는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까.” 예수께서는 이 질문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다만 시간표를 유보하신다. “때와 시기는…” 그리고 방향을 제시하신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취소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시대를 통해 더 깊고 넓게 확장되고 있다. 성령의 시대를 통해 확장되며 완성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단순한 정치적·국가적 회복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회복이다. 그리고 예언의 역사적 성취이다. 그것은 천년왕국 속에서 드러나는 통치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모든 역사는 완성된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온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사건이며, 천년왕국은 우주의 힐링 과정으로서 선지서의 약속이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결정적 연결 단계이다. 성경은 종말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핵심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흔드시고 정렬하신다. 하나님은 통치하시고 완성하신다. 이 과정에서 악의 세력은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 통치는 완성된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시며.” 이것이 성경적 종말론의 결론인 셈이다.

최종 부르심, 거룩과 추수

종말론의 결론은 지식이 아니라 삶이다. 깨어 있음의 삶이다. 거룩의 삶이고 추수의 사명을 이루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된 신부로 살아야 하며 동시에 부름 받은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계 19:7) “추수할 것은 많되….”(마 9:37) 신부의 영성과 추수의 영성이 종말 시대의 최종 결론이다. 통합적 종말론은 선택이 아니라 이 시대의 필수이다. 통합적 종말론은 서로 다른 해석을 넘어, 우리를 깨어 있는 신부와 추수의 사명자로 세워 하나님 나라 완성의 흐름 속에 참여하게 한다. 이제 논쟁을 멈추고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끝을 아는 사람은 흥분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않는다. 항상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 성령 안에서 거룩(Holiness)과 추수(Harvest)를 열망한다.

황성주
쿠미대학교 총장·사랑의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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