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마저 멈춰선 스리랑카 보석 같은 공간 [서현정의 월드 베스트 호텔]
안개 같은 비가 내리는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이 멈춘 듯한 작은 저택 앞에 당도하게 된다. 문을 열면 좁은 복도가 과거의 기억을 정렬하듯 이어지고, 이내 시야를 압도하는 것은 통창과 테라스 너머 캐슬레이 호수(Castlereagh Lake)의 장엄한 정경이다. 이곳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호텔 ‘실론 티 트레일(Ceylon Tea Trail)’의 서머빌 방갈로다.
우리는 흔히 호텔이라 하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떠올리지만, 이곳은 그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호수를 호위하듯 홍차 밭 사이사이에 흩어진 다섯 채의 방갈로. 19세기 말 영국 식민지 시절, 홍차 관리인들의 고단함과 휴식이 머물던 숙소는 이제 단 27개의 객실만을 허락하는 은신처가 됐다. 2005년, 세계 유일의 차 농장 리조트로 만들어진 이곳은 현대적 편의를 갖췄으면서도 과거의 공기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27개 객실이 전부
많은 호텔이 홈 어웨이 홈(Home away home)을 말하지만, 실제로 집보다 더 집 같은 안온함을 주는 곳은 드물다. 여길 가는 여정을 보면 이 말이 실감 난다. 호텔로 가는 길,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처럼 얼마나 남았는지 묻는 친절한 전화가 호텔로부터 걸려온다. 번거로운 체크인 절차 같은 것은 없다.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직원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 각 객실에는 번호표도 붙어 있지 않다. 그저 각 방갈로의 콘셉트에 따른 예쁜 이름이 있을 뿐이다. 때론 꽃 이름이고 때론 홍차의 종류다. 객실 번호가 없는 만큼 열쇠도 없다. 방을 잠가두고 움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 집처럼 방과 거실, 테라스, 정원, 수영장을 편하게 드나들면 된다.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하는 이날의 버틀러는 오는 길에 시장하지는 않았는지, 목이 마르지는 않은지부터 묻는다. 원하는 웰컴 드링크가 준비되고 배가 고프면 바로 식탁이 마련된다.
오후가 되면 홍차의 세상에 온 만큼 티타임이 시작된다. 외부에선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다양한 등급과 품종의 홍차를 전문가의 도움과 설명을 따라 맛볼 수 있다. 하늘과 호수와 홍차 밭을 배경으로 차려지는 알록달록 예쁜 애프터눈 티의 다과와 화려한 다기, 반짝이는 실버웨어들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애프터눈 티는 이 방갈로의 스타일 그대로, 100년 전 영국에서 이렇게 먹었겠지 싶은 모습이다. 계란과 오이가 들어간 핑거 샌드위치와 스콘, 클로티드 크림까지. 예전 식탁예절 책에서 공부했던 내용들이 재현돼 나와 반갑다.
티를 마시고 나면 담당 셰프가 찾아와 버틀러와 함께 저녁 식사에 대해 묻는다. 스리랑카 음식은 물론 영국식, 이탈리아식, 미국식까지 원하는 음식을 의논할 수 있다. 베지테리언인지, 알레르기가 있는지를 고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재료만 있다면 손님의 의사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홍차가 식재료의 하나가 되는 ‘티 인퓨즈드 디너(Tea Infused Dinner)’가 가장 많이 선택된다. 저녁 식사가 시작될 쯤이면 이용객들이 자연스럽게 거실로 모여든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벽난로를 앞에 두고 서로가 원하는 식전주나 음료를 주문하고 함께 담소를 나눈다. 홍차가 들어간 실론티 트레일의 시그니처 칵테일이 역시 가장 인기다. 테이블마다 하나둘 식사가 시작되면 건물 곳곳의 클래식한 백열등과 함께 밤의 분위기가 따뜻하게 무르익는다.
이 모든 경험은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 일체 포함)’라는 이름 아래 자유롭다. 아침의 홍차 밭 산책과 공장 견학까지 포함된 이 치밀한 설계의 배후에는 스리랑카 3대 홍차 회사인 딜마(Dilmah)가 있다. 창립자 페르난도(Fernando) 가문의 아들 말릭(Malik)은 스리랑카의 자연과 전통, 홍차의 매력을 집약해 이 경험의 모든 것을 완성했다.

‘를레 앤 샤토’도 강추
실론티 트레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5년 전 쯤이었다.
여행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전 세계 다양한 호텔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가장 많이 참고로 했던 ‘를레 앤 샤토(Relais & Chateux)’라는 호텔 가이드 북. 를레 앤 샤토는 1954년 프랑스 남부에서 작은 호텔들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호텔 레스토랑 연합이다. 처음에는 5개의 호텔이 모여 시작했지만 현재는 전 세계 65개국 280여개의 호텔, 레스토랑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대규모 연합이다. 매년 심사를 통해 회원사를 유지하는데 평가 기준이 매우 까다롭다. 소유주가 직접 책임지고 경영하는 곳, 고유의 문화를 존중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곳, 음식에 진심이고 상당한 수준을 갖출 것 등이다. 한마디로 럭셔리하면서도 특색 있는 ‘작은 브랜드, 깊은 스토리’의 매력적인 호텔과 레스토랑들을 찾는 연합이다. 현재는 대부분의 정보를 온라인으로 제공하지만 당시만 해도 모든 회원사의 정보가 들어 있는 가이드북이 매년 발간됐다.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공부를 했고 그 안에서 실론티 트레일을 발견했다.
스리랑카라는 미지의 나라, 그 속에 최고의 홍차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작은 호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 것 같은 분위기… 사진 한 장 한 장이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한 장면처럼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 호텔을 방문했을 때 그 만족감은 오랜 기대와 기다림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스리랑카를 다녀와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추천을 해봤지만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인도도 조심스러운데 인도하고 비슷하면서 더 작고 못 사는 나라가 안전하기는 하냐, 뭐 볼 거는 있냐는 생각들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스리랑카는 인도양의 보석이라는 별명대로 아름답고 흥미진진한 여행지다. 홍차 외에도 유명한 불교 성지 순례의 나라이며 바다, 자연과 관련된 액티비티도 다양하다. 전 세계 7종류 바다거북 중 5종류가 알을 낳고 자라는 모습과 관찰선을 타고 거대한 고래를 찾아볼 수 있고 야생 코끼리, 표범 사파리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인도양의 오렌지빛 석양은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다양한 향신료를 이용한 음식들은 자극적이지만 중독적이다. 인도와 가깝고 비슷하지만 인도와는 다른 이국적인 매력으로 가득하다. 실론티 트레일에서는 스리랑카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리조트 ‘케이프 웰리가마(Cape Welligama)’와 본격적인 사파리를 즐길 수 있는 텐티드 캠프 ‘와일드 코스트 롯지(Wild Coast Lodge)’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못한 이 멀고 먼 작은 섬나라에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 최고의 호텔들이 그렇게 숨어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58호(2026.05.06~05.1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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