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넘게 바다에 유골 방치..." 한 풀지 못한 채 떠난 아들

이국언 2026. 5. 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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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시마 폭침으로 아버지 잃고 유골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한영용 유족회장... 그의 쓸쓸한 마지막 길

[이국언 기자]

 한영용 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거창의 한 장례식장
ⓒ 이국언
"세 살 아들 영용이가 83살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제 아버지를 만나러 하늘나라에 갈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유골조차 아직 못 찾고 있으니 아버지를 만나서 '나만 왔다'고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

그의 마지막 소원, 지난 2025년 8월 우키시마호 참사 80년을 맞아 밝힌 그 간절한 바람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진상규명에 애써 온 한영용(경남 거창) '우키시마호 사건 피해자 배상 추진위원회' 회장이 지난 4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한 회장이 아버지의 흔적을 찾겠다며 발 벗고 나선 것은 1972년 무렵부터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 동분서주한 것만 54년 세월이다.

세 살 때 부친이 일본 북단 아오모리에 '징용'

부친 한석희(1916년생)씨가 일본에 끌려간 것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5년 1월경. 한 회장이 세 살 때였다. 경남 거창군청에 모여 출발해 도착한 곳은 일본 홋카이도와 인접한 아오모리현 시모키타 반도에 위치한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였다.
 전장 114.8m 길이의 거대한 크기인 우키시마호
ⓒ 자료사진
시모키타 반도는 대부분이 산악지대로 해안이 절벽으로 이뤄져 일본인들조차 접근을 꺼리는 곳이었다. 일본군은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이곳을 군사요충지로 삼고 대대적인 진지 구축에 나섰다. 이곳 철도, 터널, 부두, 비행장 공사에는 조선에서 끌려온 수천 명의 징용자들이 몇백 명씩 무리를 지어 강제노동에 동원되고 있었다. 부친은 비행장 격납고 구축공사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처지는 참혹하기만 했다. 반찬이라곤 고작 단무지 한 조각 정도였고, 배가 고픈 이들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돼지 죽통을 훑기도 했다. 영하 40도를 넘는 매서운 추위였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담요 한 장뿐이었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이어 8월 18일, 오미나토 경비부 사령관 명의로 조선인들에 대한 승선 명령이 내려졌다. 일본이 종전을 선언한 지 불과 3일밖에 안 된 때였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했지만... "시신도 없이 초상 치러"

한 회장의 부친 한석희씨도 최초의 귀국선 우키시마호에 올랐다. '바다에 떠 있는 섬'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우키시마호는 길이만 114m에 이르는 4730톤급의 초대형 선박이었다. 일본은 상선이었던 이 배를 해군 수송선으로 개조해 해군 함정으로 사용해 오고 있었다.
 우키시마호 예정 항로와 실제 폭침 사고 항로
ⓒ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8월 22일 오미나토항을 출발한 우키시마호는 예정대로라면 8월 25일 부산에 도착해야 했다. 그러나 그 배는 목적지인 부산항에 도착하지 않았다. 출항 이틀째인 8월 24일 오후 5시 경 마이즈루(舞鶴)항 인근 시모사바가(下佐波賀) 마을 앞 바다에서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폭발 사고로 침몰했기 때문이다.

부친의 사망 소식은 면에서 같이 끌려갔다가 귀국선 우키시마호 폭침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고 유경수 할아버지를 통해 알려졌다.

"집에서는 시신도 없이 초상을 치렀죠. 조부님 살아 계실 때인데, 읍내 장날 나가면 술 드시고 군수한테 쫓아가 '죽은 외아들 내놔라', '내 아들 내놔라'라고 고함을 지르며 행패 부리고 난리를 폈죠."

일본 정부, 사고 원인 규명도 승선자 명부도 '발뺌' 일관
한 회장은 피해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전국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나갔다. 1991년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도 제기했지만 2004년 일본 최고재판소가 원고 측 상고를 기각하면서 최종 패소했다.
 의문의 폭발로 교토 마이즈루항 인근에서 침몰한 귀국선 우키시마호. 선체가 모두 가라앉고 상단만 겨우 남아 있는 모습
ⓒ 자료사진
그뿐만이 아니다. 사고 원인도 아직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투하한 기뢰에 의한 촉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피해자들은 이구동성 고의적인 폭발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망자 규모도 문제다. 일본정부는 승조원(일본 해군) 255명, 조선인 3735명이었고, 그중 승조원 25명, 승객 52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생환자들에 따라서는 최소 사망자가 3천 명에서 많게는 7천 명에 이른다는 주장까지 있다.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승선자 명부. 그러나 소송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줄곧 관련 자료가 없다고 발뺌해 왔다. 그러나 결국 거짓임이 밝혀졌다. 2024년 일본 언론인 후세 유진씨에 의해 79년 동안 일본 정부가 관련 명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감춰 온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24년 8월 우리 정부에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실 투성이로 밝혀지고 있다.

뒤늦게 선체 인양 뒤 고철 매각...유골은 분골 뒤 합사
 수년간 방치돼 있다가 뒤늦게 선체에서 발견된 승선자 유골
ⓒ 자료사진
희생자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무례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일본이 선체 인양에 처음 나선 것은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5년이나 지난 1950년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고철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때였다. 최종 인양이 이뤄진 건 그로부터 다시 4년 뒤인 1954년이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무려 9년 뒤였다. 인양된 선체는 곧바로 고철로 매각됐다.
"일본이 죽은 사람들 존중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고철로 팔아먹을 작정이었죠. 아직도 그 바다 밑에는 유골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2010년 12월 12일 도쿄 한국 YMCA호텔 9층 대강당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도쿄집회. 대만, 중국, 한국, 일본, 총련을 대표하는 과거사 문제 관련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영용 회장이 한국 상황을 보고하고 있다. 상복을 입고 참석한 일제 피해자 유족들도 보인다.
ⓒ 이국언
유가족을 더 애태우는 것은 유골 수습 문제. 일본은 선체 인양 과정에서 발견된 유골을 서로 뒤섞어 혼합, 분골한 뒤 도쿄 유텐지에 280위를 합사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아무리 유골이라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죠."

일본 언론인 후세 유진씨에 의해 지난달 우키시마호 선체 인양 당시 사진 17장이 새로 공개됐는데, 이를 두고 유족들은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렸다. 인양한 유골을 서로 뒤섞어 쓰레기처럼 상자에 마구잡이로 쓸어 담아 취급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12년 직접 사비 들여 사고 현장 수중 수색 나서기도
 위령제가 끝난 후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마이즈루만 사고 현장에서 바다에 꽃을 던지며 오열하고 있는 유족들
ⓒ 자료사진
정부의 태도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그동안 외교부에 여러 차례 일본과의 공동 조사를 제안했지만 돌아온 것은 '노력하고 있다'는 허망한 대답뿐.

급기야 한 회장은 2012년 5월 사비를 들여 30년 경력의 베테랑 잠수사 2명을 데리고 마이즈루만 사고 현장에서 1주일 동안 수중 수색에 나서기까지 했다. 아버지 유골이라도 고국 땅에 모시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침몰지에 가면 바닥에 3m 정도 펄과 부산물이 쌓여 있어요. 80년 동안 방치하고 있는 거예요.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니에요?"

한 회장은 거창에서 오랫동안 양계장을 운영해 왔다. 그동안 일본을 오고 간 것만 30여 차례. 무슨 희망이라도 있으려니 하며 일제 피해자 활동을 쫓아 온 지 반백 년이 넘었지만, 일본 정부도 우리 정부도 화답이 없었다.

"일제 피해자들은 배우지도 못했고 돈도 없어요"

"보상금에 욕심 있었다면 이 짓 진작 때려치웠죠. 아버지의 유골이라도 고국에 모셔 놓고 죽어야 저승에 가서라도 아버지 볼 면목이라도 있지..."

그러나 54년 발걸음은 끝내 멈춰 서고 말았다. 그동안 함께 활동해 오던 동료들도 부고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미 사망하거나 거동조차 힘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의 빈소가 더욱 쓸쓸했던 이유다.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하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
ⓒ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국외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는 434명. 2025년 640명에서 1년 사이 206명이 줄었다. 부고 기사 한 줄 없는 쓸쓸한 죽음 앞에서 지난 2025년 10월 고인이 남긴 말이 두고두고 뼈에 박힌다.
"일제 피해자들은 배우지도 못했고 돈도 없습니다. 수천 명이 바닷속에 숨졌는데, 80년 넘도록 방치돼 있어요. 일본에 제대로 추궁 한번 해 본 적 없고, 조사해 볼 의지마저 없고...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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