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장수의 선택을 넘어, '구조'로 이해하는 역사

박균호 2026. 5. 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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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지도와 전쟁으로 다시 읽는 한중일 세계사>

[박균호 기자]

우리 정치와 역사, 사회를 제대로 살펴보면 필연적으로 '한중일'이라는 말과 자주 만나게 된다. 중국은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오랫동안 교류와 충돌을 거듭해 왔지만, 한국이나 일본만큼 오늘날까지도 안보와 경제, 역사 인식의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는 드물다. 과거의 전쟁과 외교 갈등은 물론이고, 지금의 산업 경쟁, 영토 문제, 미중 갈등까지 세 나라는 하나의 고리에 연결된 듯 서로의 선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동민 교수의 <지도와 전쟁으로 다시 읽는 한중일 세계사>(2026년 4월 출간)는 이 복잡한 관계를 지도와 전쟁이라는 틀로 다시 읽어 내는 책이다. 한중일 관계사를 다룬 책은 많지만, 이 책은 상대를 넘어서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는다. 세 나라가 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끊임없이 경계해 왔는지, 왜 경제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충돌하는지, 왜 같은 지역 안에서 갈등과 협력이 반복되는지 지리와 전쟁의 흐름 속에서 추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중일 관계를 감정이나 당위가 아니라 구조와 조건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표지
ⓒ 갈매나무
이 책의 출발점은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은 흔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불러온 침략 전쟁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저자는 임진왜란을 에스파냐발 은의 유입, 세계 해양무역 네트워크의 확장, 명나라 중심 질서의 균열 속에서 다시 바라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흘러나온 은이 세계 무역의 흐름을 바꾸고, 일본이 은 산지로 떠오르며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운 과정이 임진왜란의 배경과 연결된다. 이렇게 보면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넘어 세계사의 변화가 한반도에 도달한 사건이 된다.

이 책의 재미는 우리가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사건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데 있다. 일본이 끝내 조선을 굴복 시키지 못한 이유도 군사력이나 명분의 문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일본은 조선의 실제 지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 전에 작성한 조선 지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베껴 만든 수준에 가까웠고, 산악 지형과 이동 거리, 겨울 기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 그 결과 동상과 질병 같은 비전투 손실도 컸다. 이 대목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실패를 떠올리게 한다. 전쟁은 병력과 무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지리와 기후를 모르면 강한 군대도 무너질 수 있다.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시선도 흥미롭다. 우리는 흔히 조선이 아무 준비 없이 당했고,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책은 병자호란을 그렇게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다. 조선은 청의 침략 가능성을 어느 정도 예상했고, 나름의 대비도 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산악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고 조총 부대를 운용하며 청군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혔다. 문제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괄의 난, 내부 혼란을 거치며 이미 국력이 크게 소모된 상태였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 소빙기로 인한 기후 악화와 농업 생산력 저하까지 겹치면서 전쟁을 버틸 힘이 약해져 있었다. 저자는 전쟁을 왕과 장수의 선택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기후와 식량, 지형과 이동로까지 함께 읽어 낸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풍부한 지도 자료다. 저자는 해상 교통로, 산맥과 강, 국경과 요충지, 전쟁의 이동 경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공간을 지도와 함께 보여 준다. 덕분에 독자는 사건을 연표로만 따라가지 않고, 왜 그곳에서 충돌이 벌어졌는지, 왜 어떤 길은 공격로가 되고 어떤 지역은 방어선이 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지도와 전쟁으로 다시 읽는 한중일 세계사>는 지리와 역사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한중일 500년 분쟁사를 통해 증명하는 책이다.

19세기 이후의 내용은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아편전쟁은 무역 불균형과 은의 흐름 속에서, 청일전쟁은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격차 속에서, 러일전쟁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 속에서 설명된다. 20세기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역시 한중일의 역사를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읽게 한다.

책의 후반부가 흥미로운 것은 이 갈등의 흐름을 과거 전쟁사에서 멈추지 않고,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 경제 질서와 신냉전의 문제로 이어 간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영토와 식량, 항구와 교역로를 둘러싸고 충돌했다면, 오늘날에는 반도체, 공급망, 해상 교통로, 에너지, 기술 패권을 둘러싼 지경학적 경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전쟁의 형식은 달라졌지만, 지리와 자원, 교역로를 둘러싼 힘의 다툼은 여전히 한중일 관계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중일 관계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한 나라의 성격, 지도자의 욕망으로 설명하던 사건들 뒤에 지형과 기후, 자원과 교역로, 세계 경제의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인다. 일본은 왜 조선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다고 오판 했을까. 조선은 병자호란 때 정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까. 명청 교체와 소빙기는 동아시아 질서를 어떻게 바꾸었을까. 한반도는 왜 반복해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공간이 되었을까. 이런 질문들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든다.

역사책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동아시아를 읽는 책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땅의 모양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 땅을 둘러싼 힘의 이동, 자원의 흐름, 교역로의 변화, 국가의 생존 전략을 함께 읽는 방식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서 시작해 신냉전과 경제 전쟁까지 이어지는 한중일 관계의 긴 흐름을 보여 준다. 그래서 과거의 전쟁과 오늘의 산업 경쟁이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한중일 관계를 분노와 경계로만 바라보지 않고, 갈등의 조건을 이해한 뒤 더 나은 공존의 방향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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