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일어날 듯한 왕건 청동상, 이런 뜻이라네요

이완우 2026. 5. 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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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의 상징이 된 사찰 논산 개태사... 천 년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곳

[이완우 기자]

 논산 개태사 신종루
ⓒ 이완우
나무마다 연둣빛이 짙어가는 5월 초순, 논산 개태사를 찾아 여행하였다. 개태사 도량은 천호산(天護山)이 호위하듯 병풍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 산은 오른쪽으로 길게 산봉우리가 이어져 흐르는 형세여서 연산(連山)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 천호산의 원래 이름은 황산(黃山)이었다. 백제의 계백 장군이 신라의 대군을 맞이하여 옥쇄한 역사적인 현장이다.
개태사 문루인 신종루(神鍾樓)에 들어섰다. 신종루의 문간에는 네 사천왕이 큼지막한 그림으로 그려졌다. 신종루 누각에는 법고, 범종, 목어와 운판의 불교 음악 도구인 사물(四物)이 걸려있었다. 번성했던 고려 왕실 사찰은 폐허를 거쳐 다시 복원되었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문화재와 사라진 옛 터의 흔적을 안고 있었다.
 논산 개태사와 배경 천호산(황산) 전경
ⓒ 이완우
신록으로 물든 천호산(황산) 기슭 아래, 고즈넉한 개태사와 고탑이 봄 햇살 속에 평온히 서 있었다. 이 사찰의 안내판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태조 19년)에 후백제 신검의 군대를 이곳 황산산성과 황산벌에서 물리치고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업적을 기념하여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이 사찰을 완공하였다.

왕건은 사찰의 낙성을 기념하여 '개태사화엄법회소'를 지었다. 이 글에 따르면 '부처의 가호와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하여 이곳 황산의 이름을 '천호산(天護山)'이라 하고, 태평성대를 연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개태사(開泰寺)'라 지었다고 하였다. 고려 후대에 이 사찰에 고려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진전(眞殿)을 건립하였다.

왕건 청동상 자세의 의미
 논산 개태사 어진전
ⓒ 이완우
어진전 앞에 섰다.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은 의자에 앉아 두 발을 내리고 있는 의좌상(倚坐像)이었다. 이런 자세는 불교 미술이나 왕실 조각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한다.
불교 미술에서는 미륵보살이 하생할 때 이런 자세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개태사 어진전에서의 이러한 자세는 '태평성대를 가져온 군주'라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논산 개태사 오층 석탑
ⓒ 이완우
 논산 개태사 철확
ⓒ 이완우
개태사 오층 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석탑이다. 안정감 있는 비례와 단정한 층층 구조가 특징이다. 개태사 철확은 개태사가 창건 당시부터 부엌에서 사용하던 지름 3m 규모의 큰 쇠솥이다. 개태사가 폐허되어 벌판에 방치되기도 했고, 대홍수로 10리 밖까지 떠내려가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박람회 출품이나 공원에 전시되기도 하다가, 현재는 다시 개태사 경내로 돌아와 천 년에 걸친 개태사 성쇠의 역사를 전하고 있었다.

논산 개태사지 극락대보전에서 석조여래삼존입상을 참배하였다. 이들 불상은 개태사 건립 당시에 이곳에 조성된 아미타삼존석불로 추정된다. 이곳 불상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는데, 웅장한 규모와 강인한 조형미가 특징이며, 통일신라 불상의 유려함에서 벗어나 장중 하고 소박한 미감을 보여 준다고 한다. 두터운 신체 표현과 단정한 옷 주름, 근엄한 얼굴은 새 왕조의 안정과 호국 의지를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내부에는 촬영 금지 안내문이 게시 되어 있었다.

천년 개태사의 흥망성쇠
 논산 개태사 극락대보전 (석조여래삼존입상 봉안 불전)
ⓒ 이완우
 임실 성수산 황룡바위, 왕건 기도터 일화 전승 장소
ⓒ 이완우
이곳 개태사가 폐허가 된 이후에도 이곳 절터는 몇 점의 유물만 남은 개태사지(開泰寺址)로 긴 세월 풍파를 견디었다. 1934년에 개태사지의 중심지에 다시 개태사를 세웠다.

하지만 현재의 개태사는 과거 고려 시대의 웅장했던 도량 규모에 비하면 훨씬 작은 수준이다. 여전히 현재의 사찰 주변 농경지와 마을 지하에는 고려 시대 개태사의 옛 부지가 잠들어 있어 깊은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논산 개태사를 둘러보면서 인간 세상의 성쇠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이곳 개태사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450여 년 동안 왕실의 사찰로 번성하였다. 조선 시대에 억불숭유 정책으로 거의 폐허에 이르렀다가, 그 폐사지에 다시 개태사를 복원하였다.

이처럼 사람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은 흥망성쇠의 역사를 겪지만, 자연은 묵묵히 그 시간을 품는다. 천 년 전, 왕건이 17살 때 도선국사의 추천으로 임실 성수산에서 기도하였다는 일화가 1895년에 임실군수였던 박시순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천 년 전 왕건의 기도 전설이 전하는 임실 성수산 황룡바위는 지금도 자연 속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폐허와 복원을 거쳐 온 개태사의 역사와 대비되며, 인간의 문명과 자연의 시간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하였다(관련기사: 연둣빛 봄의 숲속, 왕건과 이성계의 기도터 황룡바위).

개태사를 방문하고 도량을 나가려는데, 햇빛에 바래어 희미해진 입간판이 하나 보였다. 이 사찰 부지에서 출토되어 반출된 금동대탑 반환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1960년대 초 개태사 절터에서 반출된 국보 금동대탑은 현재 한 사립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2011년 법원은 소유권 불명 등을 이유로 사찰 측의 반환 청구를 기각했다. 다만, 개태사 금동대탑의 보존은 단순한 소유권 분쟁을 넘어, 훼손된 지역의 역사적 자긍심을 되찾고 올바른 역사를 바로 세우는 중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태사를 방문하고 가람의 정문인 신종루를 나섰다. 작은 연지가 분홍빛 철쭉과 연두색 나무들이 연못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천 년 개태사의 흥망성쇠도 물결처럼 마음에 조용한 여운으로 오래 번져 갔다.
 논산 개태사 연지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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