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전 국무총리 1934~2026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34년 경기도 개성시 남산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53년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듬해 자퇴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목사님 도움으로 에머리대에 장학생으로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촌 누님의 말에 시작한 도전이었다. 에머리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68년 귀국해 이듬해부터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고인은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내는 등 20년 동안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았던 고인은 8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럽정치학연구소에서 민주화에 대한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냉전 종식의 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고 감지한 그는 86년 민주화에 대비하자는 데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과 ‘서울국제포럼’을 만들었다.
노태우·YS·DJ, 세 정부서 중용…통합의 정치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 [중앙포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1735569tezl.jpg)
학자의 길에 대전환이 찾아온 건 88년이다. 당선인 시절의 노태우 전 대통령은 특강을 요청했다. 고인은 “시대적 과제는 일차적으로 민주화의 진전”이라고 전제한 뒤 영국 연방(Commonwealth·커먼웰스)의 개념을 남북관계에 적용한 ‘코리안 커먼웰스’ 개념을 30분간 강의했다. 열흘 뒤 노 당선인은 “나는 민주화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고, 통일에 대해선 이 교수가 지난번에 말한 그대로 내각에 들어와 추진하길 바란다”며 입각을 제의했다. 그렇게 노태우 정부의 첫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맡았다.
![노태우 정부 통일 장관.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1735814igfi.jpg)
고인은 89년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시해 여야 합의를 이끌어냈다.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 체제를 거쳐 통일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게 골자다. 고인은 당시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각각 이끌던 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통일 원칙에 합의한 13대 국회를 “가장 민주적이고 생산적이었다”고 훗날 평가했다.
이후 ▶대통령 정치특별보좌관 ▶주영국 대사를 지낸 그는 김영삼(YS) 정부에선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맡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 직전까지 이끌었다. 북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 94년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만나 7월 25일 YS와 김일성 주석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고인은 만년에도 “성사 직전 김일성의 급서로 정상회담이 무산된 게 너무 아쉽다”고 말하곤 했다.
![김영삼 정부 국무총리. [중앙포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1737060qjoh.jpg)
그런 고인은 94년 12월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2002년 월드컵유치위원장을 맡은 고인은 총리와 위원장직을 겸직하며 전 세계에 월드컵 유치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총리로서 YS 정부의 세계화를 이끈 고인은 1년여 뒤 자리를 내려놨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책임을 많이 느낀다”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95년 6월 29일)를 언급했다. 사고 당시 그는 바누아투공화국 총리와 공식 만찬 도중 현장으로 달려갔다.
공직을 거친 그는 96년 신한국당에 합류해 그해 15대 총선에선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책임 총리를 통한 권력 분산, 후원회 없는 정치 등 이른바 ‘새 정치 모델’과 통일 대통령을 내세워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중도 포기한 고인은 “정책에 시비를 걸어올 주자를 기다렸지만 단 한 사람, 단 한 건도 잘잘못을 따져온 주자는 없었다”고 개탄했다.
98년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위기 속에 출범한 김대중(DJ) 정부엔 한·미 관계가 매우 중요했다. DJ는 미국 조야에 인맥이 두텁고 총리까지 역임한 고인을 주미국 대사 적임자로 여겼다. 청와대의 제의를 수차례 고사했지만 “경제 위기의 조기 해결과 국제 신인도의 제고를 위한 여건을 조성할 수 있도록 주미 대사를 맡아 달라”는 DJ의 직접 부탁까지 뿌리칠 순 없었다. 고인은 “개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외환위기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살리겠다고 결심했다”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미국 주요 인사들을 만나 한국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고 회상했다.
![김대중 정부 주미 대사. [중앙포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1738347ovkr.jpg)
2000년 대사직을 마친 고인은 중앙일보 고문을 맡아 학계와 정계, 외교가를 누비며 얻은 실천적 경험과 지식을 전파했다. 중앙일보에 연재한 ‘이홍구 칼럼’은 늘 정치 현안과 남북관계에 관한 혜안으로 빛났다. 민주화 이후 이어진 3개의 정부에서 모두 중용됐던 그에겐 늘 “통합의 정치인”이란 수식어가 따랐다. 원로로서 그는 보수와 진보가 함께하는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대화 모임을 이끌며 분권형 개헌을 강조했다.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나누는 분권이 국가의 전체 권력을 오히려 늘린다”고 믿었다.
유족으론 배우자 박한옥 여사, 딸 소영·민영(동덕여대 교수)씨, 아들 현우(EIG 아시아 대표)씨, 사위 이강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 며느리 황지영(홍콩한인여성회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8일 오전 8시에 치러진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지다.
허진·오소영 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술에 ‘이것’ 한 방울 넣어라”…90세 애주가 뇌 쌩쌩한 비결 | 중앙일보
- “내신 3등급도 의대 간다”…입시판 뒤흔든 ‘꿀전형’ 뭐길래 | 중앙일보
- “아버지입니까 檢총장입니까” 구속 된 그때, YS 차남의 충격 | 중앙일보
- “목욕 후 상의 벗고, 여자에게 들이대”…전청조 교도소 근황 | 중앙일보
- 광주서 여고생 흉기 찔려 사망…경찰 ‘2명 피습’ 20대 검거 | 중앙일보
- 이건 실화였다…‘17세 강간범’ 엄마의 155분 울분 | 중앙일보
- ‘부산 돌려차기’ 결정적 DNA 찾은 과수부, 해체 위기 왜 | 중앙일보
- 피자 먹으며 여성 딜러 토막냈다…“차 3대 살게요” 그놈 정체 | 중앙일보
- 3년만에 35억 찍고 은퇴했다…92년생 파이어족의 ‘몰빵 종목’ | 중앙일보
- 허리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그날 오세훈 ‘눈물의 구급차’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