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간 단종에 매달렸다… ‘왕사남’ 여운, 전시장으로

1986년. 딱 40년 전의 일이다. 그해 서울대 미대 교수로 임용된 35세의 서용선은 개인적인 일로 인간관계에 회의에 빠졌고, 기분 전환을 위해 지인이 사는 강원도 영월로 훌쩍 떠났다. 쇠목이라는 곳에서 친구가 말했다.
“여기가 강에 던져진 단종의 주검이 떠올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야.”
퍼런 강물을 묵묵히 바라보던 서용선은 그때부터 뭔가에 끌리듯 비극의 주인공 단종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이후 40년간 천착해온 단종 그림을 주제로 전시를 하고 있다. 단종이 유배됐던 영월의 영월관광센터 전시실(지난 3일 종료)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디스코스온아트(이달 23일까지), 갤러리밈(29일까지), 아트스페이스3(20일까지), 갤러리JJ(6월 6일까지) 등 4곳에서 개인전이 한창이다.

지난달 28일 작가와 함께 영월로 답사를 갔다. 단종 그림의 무대가 된 역사 현장을 둘러보고 영월관광센터 전시실을 찾았다. 단종의 능인 장릉과 유배지 청령포에는 평일임에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장항준 감독이 단종을 소재로 만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관객 1600만명을 돌파하며 한국 영화 역대 흥행 2위를 기록했다. 권력 암투가 아니라 단종과 영월 광천골 사람들 간 인간적인 교감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서사, ‘너의 실패는 네 탓이 아닌 사회 구조 탓’이라는 위로가 MZ세대에 주는 공감 등 흥행 비결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왔다.
그렇다면 서양화가 서용선이 40년 넘게 단종에 천착해온 이유는 뭘까.
“실질적인 정치적 권력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어린 왕이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아주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극명하게 투영된 사건이지요. 그게 1980년대의 권력을 둘러싼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느낀 역사의 불합리함 등과 겹쳐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단종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유배지 영월에서도 겨우 넉 달을 지내다 죽임을 당한 단종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통상의 구상화로는 그 비극성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 우연히 ‘아트 인 어메리카’ 잡지에서 미국 화가 줄리안 슈나벨의 자유로운 드로잉을 보고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이 시기 그린 '유배-청령포로 가는 길’ 등 초기작부터 전형적인 구상화와는 다른 신표현주의적인 붓질이 있다. 서용선 그림의 특징은 거친 선, 일부러 뭉갠 형상, 과장될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대비 등으로 요약된다. 서용선 표 조형 언어가 바로 40년 전 단종 그림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후 서용선의 캔버스에는 생육신 김시습, 그리고 세조의 동생이자 예술 후원자 겸 서예가인 안평대군 등으로 계유정난과 관련된 인물이 풍성해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에서 나아가 한국전쟁, 노근리 사건, 세월호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으로 확장됐다. 그래서 서용선은 ‘역사화’라는 장르를 연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서용선의 역사화는 서구에서 역사화 장르를 연 프랑스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화풍과 전혀 다르다. 신고전주의는 조각처럼 선명한 화면, 수직과 수평의 구도, 연극적 구성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비극적 역사를 다루는 서용선의 역사화는 거친 선이 이리저리 날리고, 형태는 일그러져 있으며, 그 일그러진 형태를 빨강 파랑 녹색 노랑 등 원색이 채운다. 그래서 불합리한 역사에 대한 분노의 정서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불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듯 40년간 160점의 유화 및 아크릴화와 390여점의 드로잉으로 단종 관련 그림을 제작했다. 그중에서도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영월의 ‘단종애사’를 그린 작품이 가장 많다. 영화에서처럼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유배지 청령포는 섬 아닌 섬이었다. 하늘을 가리듯 빽빽한 소나무 숲에 숨은 듯 엎드린 단종의 거처가 나타난 순간, 뼛속 깊이 사무쳤을 어린 폐왕의 고립감이 느껴져 먹먹해졌다. 작가의 심정도 그랬을까. 영월관광센터 전시실에 걸린 작품 ‘노산군’은 청령포를 파란색 강으로 둘러싸인 붉은색 땅으로 극명하게 색을 대비시켜 표현함으로써 단종의 고립감을 극대화시킨다. 가장 마음을 흔드는 그림은 청령포 강물에 떠오른 단종의 주검을 상상하고 애도하는 아내 송씨 부인(정순왕후)을 그린 ‘청령포-송씨 부인’이다.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이라는 세조의 엄포에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묻으러 가는 엄흥도를 형상화한 작품도 볼 수 있다. 계유정난의 주요 장면을 담은 가로 5m가 넘는 3폭 대형 회화도 압권이다.
‘서용선의 단종 그림’ 전시 프로젝트는 서울대 교수 재직 시절 유난히 호흡이 잘 맞았던 미술평론가 정영목 전 서울대 교수의 집념과 기획으로 성사됐다. 그는 1990년대부터 단종 그림만 모아 전시와 출간을 하자고 제안했다. 여러 사정으로 미뤄지던 프로젝트는 지난해부터 본격화됐다. 마침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이 시대 국민에게 가장 잘 파고드는 서사를 예견한 전시가 됐다.
영월=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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