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개의 파도를 품었다…김보희 바다가 태어난 곳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싶었는데 사방에서 돌풍이 몰아쳤다. 노란 유채밭을 배경으로 야자수가 흔들렸다.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마저 이국적이었다. 지난 3월 24일 서귀포 김보희 스튜디오로 가는 길이었다. 문패도, 이름도 없이 우편함에 빨간 장미꽃만 한 송이 새긴 집이다.
화가 김보희(74). 1970년 이화여대 동양화과에 입학해 동 대학원 졸업 후 2017년까지 모교 동양화과 교수를 지냈다. 이화여대 박물관장도 역임했다. 은퇴할 무렵 제주에 정착했다.
1975년 신혼여행으로 제주에 온 게 시작이었다. 2박 3일의 짧은 버스 여행이었다. 야자수가 이국적이고 겨울에도 초록이 많은 제주가 그렇게 좋았다. 결혼기념일마다, 또 틈만 나면 제주를 찾았다. 만년에 제주에서 살 요량이었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지금의 중문. 벽돌집 뒤뜰엔 야자수와 용설란이 무성하다. 앞뜰엔 하귤이 주렁주렁 열렸고, 로즈메리가 은은한 향을 발산했다. 그의 그림에서 보던 래브라도 리트리버 레오가 낯선 방문객에게 다가와 킁킁거렸다. 눈앞에 그림 속 ‘김보희 월드’가 펼쳐졌다.

집은 중문 바다가 보이는 귤밭 앞에 자리 잡았지만, 2층엔 남쪽으로 창을 내지 않았다. 색을 다루려면 빛을 조절해야 하기에 외부 변수를 최소화했다. 층고 5m 작업실을 오로지 그림을 위한 공간. 남들은 통창을 내지 못해 안달일 위치였건만, 바다가 보고 싶으면 옆에 테라스로 나가면 될 뿐이라고 김보희는 생각했다. 그나마도 집 앞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전망을 가린 뒤엔 속이 상해 반년은 테라스에도 못 나갔다.
서울보다 몇 배 큰 작업실을 갖게 되니 그림 크기부터 커졌다. 손 닿은 곳 초록의 세계가 그대로 화폭에 들어왔다. 캔버스에 동양화 분채로 그린다. 캔버스에 아교·호분·젯소 섞어 두세번 밑칠한 뒤에 잔 붓으로 촘촘하게 채색을 얹는다. 유화는 바르면 척 붙는데, 동양화 물감은 몇 번씩 발라야 발색이 되고 잘 얹힌다. 빡빡 그을 정도로 선을 그려야 해서 손에 힘이 들어간다.
![캔버스 12폭의 대작 ‘더 데이즈(The Days)’. [사진 갤러리현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0450880ibjw.jpg)
1981년 제30회 국전에 특선하는 등 50년 넘게 그리고 전시했지만, 대중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진 건 2020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때부터다. BTS RM이 다녀간 전시로 입소문이 나면서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섰다. 체온을 재고 방문 기록을 남겨야 했던 코로나19 시기, 그의 초록 화폭이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줬다.
세상의 관심이 뜨겁건 아니건, 그는 오늘도 칩거해 그린다. 아침 6시면 일어나 식사 준비를 하고, 날이 좋으면 커피잔을 손에 든 채 정원을 한 바퀴 돈다. 반려견 레오의 용무 해결을 위한 필수 코스다. 그러고는 2층 작업실에 올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11시 반. 내려가 점심을 차리고, 식후엔 30분쯤 졸기도 한다. 오후에 다시 올라와 그리고, 그러다 보면 밤 11시쯤 취침이다. 집도, 생활도, 모두 그림에 맞춰져 있다. 매일 작업실로 출퇴근하는 단조로운 생활이다.
Q : 바다 그림이 늘 파도 한 점 없이 잔잔한데요.
A : “때론 밤바다도 크게 그리지만 주로 한여름 바다, 맑은 날의 잔잔한 바다를 생각해요. 날씨 좋을 땐 하늘색도 틀리고 물도 비취색으로 너무나 맑아요. 파도치는 바다도 그려봤는데 마음이 심란해져서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2023년작 ‘향하여(Towards)’. [사진 갤러리바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joongang/20260506000452158skll.jpg)
바다가 잔잔한 건 그 속에 수천 개의 파도를 품어서다. 숱하게 가서 본 바다, 그 모습 그대로 그리기보다 자기 마음속의 바다, 보고 싶은 바다를 그린다.
진득함, 차분함, 꾸준함이 김보희의 특기다.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통해 처음 접한 미술이 동양화이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Q : 이름도 나셨고, 작업실에 이렇게 그림도 많이 쌓여 있어요. 이제 좀 쉬셔도 될 것 같은데, 줄곧 그리시네요. 어떤 화가로 남고 싶으신가요?
A : “내 그림이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제가 그림 속에서 표현하려는 자연의 경이로움, 생명의 기운, 평화 같은 것들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요.”

제주=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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