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 입하, 이 계절에 어울리는 육보차 한 잔

노시은 2026. 5. 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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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 머금은 초여름, 육보차 한 잔으로 몸 다스리기

바쁜 일상 속, 차 한 잔으로 일상에 쉼표를 찍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24절기와 동양화를 오가며 흐르는 시간의 아름다움을 기록합니다. <기자말>

[노시은 기자]

 "육보차를 마실 채비를 하라!" 최근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의 대사를 떠올리며...
ⓒ 노시은
밤하늘 북두칠성의 자루가 동남쪽으로 기울면, 비로소 우리는 봄과 작별하고 여름의 문턱을 넘게 됩니다. 입하(立夏). 만물이 눈에 띄게 커지는 이 무렵이면 대지에는 짙은 푸른빛이 내려앉고, 공기 중에는 묘한 열기와 습기가 뒤섞여들기 시작합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어딘가 달라진 공기의 무게가 먼저 느껴지지요. 봄이 작별 인사를 건네는 냄새, 여름이 슬며시 문을 밀고 들어오는 냄새가 함께 섞인 그 특유의 향기.

절기가 바뀌면 자연의 작은 미물들이 가장 먼저 부산을 떱니다. 잦아진 비에 흙이 촉촉해지면 지렁이들이 줄줄이 땅 위로 올라오고, 밭두렁의 호박 덩굴은 하루가 다르게 뻗어나가며 여름을 준비하지요. 무엇보다 입하의 주인공은 청개구리들입니다.

남송(南宋)의 시인 조사수(趙師秀)는 〈약객(約客)〉에서 이 계절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黃梅時節家家雨 황매시절가가우
靑草池塘處處蛙 청초지당처처와
有約不來過夜半 유약불래과야반
閑敲棋子落燈花 한고기자낙등화
황매 무르익는 계절, 집집마다 비가 내리고 / 푸른 풀 연못 곳곳에는 개구리 소리 / 약속한 이 오지 않아 밤은 깊어가는데 / 한가로이 바둑알 두드리니 심지 재가 떨어지네.

천 년의 시간을 건너도 이 풍경은 조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개구리 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여름의 첫 인사인가 봅니다.
 봄의 연두와 여름의 짙은 녹색 사이의 막 터지기 직전의 초록.
ⓒ 노시은
 북한산도 초록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 노시은
이 시기의 색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연두와 녹색 사이 어딘가일 것입니다. 아직 여름의 짙고 거친 초록에는 닿지 않았지만, 봄의 여린 연두도 이미 아닌, 폭발 직전의 팽팽한 생기. 나뭇잎 하나하나가 빛을 가득 머금고 터질 듯 부풀어 있는, 그 찰나의 녹색입니다. 이 연두와 녹색 사이의 색이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초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바라보고 싶어서, 자꾸만 창가에 서게 되는 색.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계절의 이면에는 우리 몸이 슬쩍 놓치기 쉬운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습기(濕氣)입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습은 비위(脾胃)를 가장 먼저 상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봄비가 잦아지고 땅에서 수증기가 올라오는 이맘때, 소화가 더디고 몸이 무겁고 나른한 느낌이 드신다면,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습기가 몸 안에 스며든 신호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 시기에 율무를 달여 마시거나 생강을 가까이 두며 속을 건조하게 다스려왔습니다. 몸이 먼저 계절을 알아채고, 스스로를 지키려 했던 것이지요.
 어두운 갈색의 거친 질감이 돋보이는 육보차 건차. 줄기와 잎이 엉킨 모습이 투박하지만, 이 마른 찻잎 속에 몸 안의 눅눅한 습기를 걷어낼 단단한 힘이 숨어 있다.
ⓒ 노시은
오늘 찻자리에 올린 것은 그 지혜를 이어받은 차, 육보차(六堡茶)입니다.
중국 광서성 깊은 산골 육보진(六堡鎭)에서 나는 이 흑차(黑茶)는, 수백 년 전 말레이시아 광산 노동자들이 무더위와 습기를 이기기 위해 즐겨 마셨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은 차 한 잔으로 몸 안의 습기를 걷어내고, 무거운 하루를 견뎌냈을 것입니다. 오래 발효되고 천천히 숙성된 찻잎은 검붉은 빛을 띠고, 건엽에서는 고요한 흙내와 오래된 나무의 냄새가 납니다. 마른 잎을 손 위에 올려두면 이미 어딘가 오래되고 깊은 것의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세월이 만들어낸 냄새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은.
 육보차의 깊은 향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매끄럽게 코팅된 개완보다, 흙의 질감이 살아있는 자사호가 제격이다. 열기를 깊게 머금어주는 자사호 특유의 보온성이 찻잎 속 묵은 습기를 천천히 녹여내어, 자극 없이 둥글고 편안한 차탕을 완성해 주기 때문.
ⓒ 노시은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탕은 짙고 맑은 붉은빛으로 피어오릅니다. 한 모금 머금으면 처음엔 부드러운 단맛이, 이내 대지 같은 깊고 묵직한 맛이 목 안쪽을 타고 내려갑니다. 자극 없이, 서두름 없이. 누군가의 손이 오랫동안 공들인 것들이 늘 그렇듯, 이 차도 천천히 마음을 풀어줍니다. 습기를 거두고 비위를 따뜻하게 감싸는 이 차의 성질은, 눅눅해진 초여름 몸에 마치 조용한 햇살처럼 스밉니다.
 오래된 나무의 줄기 같은 빛깔을 띠는 육보차에서는 젖은 사우나 향기가 난다.
ⓒ 노시은
바야흐로 만물이 요란하게 생동하는 입하입니다. 연두에서 녹색으로 넘어가는 그 짧고 근사한 찰나처럼, 우리 몸도 봄에서 여름으로 조용히 중심을 옮겨야 할 때입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차 한 잔 앞에 가만히 앉아, 이 계절이 건네는 인사를 천천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다가오는 장마와 한여름의 열기가 벌써부터 두렵게 느껴지신다면, 묵직하고 따뜻한 육보차 한 잔으로 먼저 몸 안의 습기부터 조용히 걷어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계절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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