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원 세탁소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 목격자의 선택이 부른 파장

정병진 2026. 5. 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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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80년대 아일랜드의 침묵과 공모의 구조 들여다 보기,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정병진 기자]

▲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포스터 팀 밀란츠 감독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 포스터
ⓒ 그린나래 미디어(주) 배급
때로 한 사람의 작은 결심이 온 나라를 뒤흔들 수도 있다. 둑의 작은 틈에서 시작한 물샘이 점점 커져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과도 같다. 서유럽 아일랜드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지난 1993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옛 수녀원 부지에서 약 155구 여성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증언과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공식 조사를 시작하였고 사실을 확인한 뒤 총리의 사과, 후속 조치가 이어졌다. 이른바 지구촌에 큰 충격을 안긴 '막달레나 세탁소 암매장 사건'이다.

팀 밀란츠 감독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4)은 바로 그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잔혹한 여성 학대나 살해, 암매장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중임을 암시할 뿐이다.

이 영화의 초점은 부조리를 보고도 침묵하는 사회 구조와 평범한 한 가장의 심적 갈등에 있다. 다른 기관도 아닌 도덕적 권위와 신뢰를 생명으로 하는 종교 기관에서 여성 학대, 감금, 살해, 암매장 등의 범죄가 150여 년 이어졌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오래도록 은폐되었는지를 이 영화는 헤아려 보게 한다. 몰입해 보는 동안 이는 아일랜드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해당할 수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 작업 중인 빌 석탄 배달 작업 중인 빌
ⓒ 그린나래 미디어(주) 배급 스틸 컷
빌 페롱(킬리언 머피 분)은 다섯 딸을 둔 가장이고 석탄 배달업자이다. 그는 이른 새벽 일터에 나가 밤에야 집에 돌아올 정도 힘들게 일한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에 딸들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마련해 줄 만한 돈도 없이 근근이 생활한다.

어느 날 빌은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석탄 창고에 갇혀 있던 한 소녀를 만난 뒤 외면하기 힘든 복잡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빌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일들을 계속 떠올리며 도움을 호소하는 소녀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그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수녀원에 들어간 소녀들이 그곳에서 인권 유린을 당하는 중임을 감지하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그는 당장 직장을 잃게 되고 딸들은 학교조차 다니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빌의 고민하는 모습을 본 아내 아일린은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르는 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라면서 "우리가 가진 걸 지켜야지"라고 말한다.

이 같은 아내의 발언이 이기적이고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적 선택이다. 실제로 수녀원의 부조리를 폭로하고 소녀를 구출한 뒤 그 가족은 온전할까? 아일린은 남편의 고민을 이해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거다.

이 같은 영화의 서사 구조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혹자는 '당장 경찰에 신고하고 언론에 제보하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주저하는 걸까'라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아일랜드의 사회적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수녀원에서 소녀들에게 이른 새벽부터 힘든 세탁 일을 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자유롭게 바깥에 나갈 수도 없다. 이는 실제로 아일랜드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아일랜드는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서유럽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가톨릭 국가였다.

19세기 중반 닥친 감자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해외로 이주했고, 1960~1970년대에는 재정 정책 실패, 낮은 산업 기반, 오일쇼크 등으로 경제적 빈곤이 심한 편이었다. 이 때문에 교육과 복지, 도덕 규범은 가톨릭 교회에 의존하다시피 하였다.
▲ 수녀원장 만나러 가는 빌 일반인의 접근이 힘든 수녀원에 들어가 원장을 만나러 가는 중인 빌
ⓒ 그린나래 미디어(주) 배급 스틸 컷
이 같은 상황에서 빌 부부가 수녀원의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면 당장 딸들이 학교 진학에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고민하는 건 당연하다. 더욱이 일자리는 부족하고 지역사회는 좁았으며, 교회가 큰 권위를 지닌 나라에서 교회 기관을 상대로 의문을 제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일랜드에서는 긴 세월 피임과 낙태가 불법이었다. 미혼 임신은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종교적 죄였고 당사자는 가족의 수치이자 사회적 낙인 대상이었다. 피임은 1980년대부터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지난 2018년에 이르러서야 국민투표로 낙태가 조건부로 합법화되었다. 그 이후 미혼 출산에 대한 사회적 낙인도 거의 사라져 가는 추세에 있다.

영화 속 주인공 빌의 어머니 세라는 미혼모였다. 그럼에도 운 좋게도 막달레나 세탁소에 구금되지 않았다. 큰 농장을 소유한 윌슨 부인이 거둬 주었기 때문이다. 윌슨 부인은 세라가 사망한 뒤 남은 빌을 고아원에 보내지 않고 맡아 길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영화는 속 시원히 알려 주지 않는다.

그런데 윌슨의 삼촌으로 알려진 '네드'라는 인물과 빌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다. 네드는 영향력이 있는 사업가이고 빌을 어려서부터 돌봐준 인물이다. 그와 윌슨 부인은 부부인지 아니면 모자 관계, 또는 친인척인지는 불분명하다. 빌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네드와 그의 모친 세라가 연인 관계에 가까웠음을 기억해 낸다. 이는 빌이 네드의 사생아였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네드는 빌을 아들로 공식 인정한 적 없고 그저 뒷배경이 되어 줄 뿐이다. 빌은 오랜 고민 끝에 수녀원에서 탈출을 원하는 소녀를 구출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가 이 같은 일을 결행한 핵심 요인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윌슨 부인이 거둬 주지 않았다면 그와 모친도 어찌 되었을지 모를 운명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떠올리며 빌은 마침내 과감한 행동에 나선다.

아일랜드는 2천 년대 이후 성직자 성학대 스캔들, 막달레나 세탁소 문제 폭로에 대한 충격으로 교회 권력 남용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커지면서 급격한 세속화로 치달았다. 정부의 아동학대 조사위원회가 설립돼 교회가 운영하던 시설에 대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고, 수천 명의 아동이 신체, 성적 학대를 당하였음이 드러났다.

이 파장과 충격으로 지난 2015년 국민투표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고, 2018년 국민투표로 낙태 금지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에 대한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미사 참여율이 급락했고, 성직자의 권위도 크게 악화되었다.

이 영화는 진실을 알면서도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은폐하고 침묵하는 구조를 보여주며 그것을 깨뜨려야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음을 일깨워 준다.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보며 '부산 형제복지원'을 떠올렸다는 사람들이 많다. 형제복지원도 아동학대와 체벌, 암매장 등이 오랫동안 이어졌으나 원장 일가는 승승장구하였다. 이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살펴보면 '막달레나 세탁소 문제'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리는 송곳 같은 사람이 없다 보니 끔찍한 범죄가 버젓이 되풀이되곤 하였다. 영화 <아주 사소한 것들>은 침묵과 은폐의 구조를 드러내고 뚜렷한 해결책 대신 질문과 생각거리를 남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겨자씨신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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