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학교에서 조용히 사라진 것들, 수학여행만이 아니다
[이경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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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사진 |
| ⓒ tinkerman on Unsplash |
가족여행이라는 말이 아직 낯설던 시절, 수학여행은 좁은 교실에 갇혀 있던 시간이 일 년에 한 번 세상으로 터져 나오는 통로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쥐포를 나눠 먹으며 밤새 도란거리던 친구들의 숨소리, 경주에서 처음 마주한 첨성대의 고요한 위엄, 통영 바다 위에서 바라본 수평선의 깊이. 그 길 위에서 나는 교실에서 배운 단어들을 비로소 살아냈다. 협력, 배려, 책임. 그것들은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몸으로 익히는 삶의 방식이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다른 세계를 산다. 여행은 흔해졌고, 낯선 풍경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수학여행을 앞둔 교실에는 설렘보다 무심한 공기가 흐른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세계 앞에서, 학교의 여행은 더 이상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교실 밖에서 배우는 경험의 의미가 줄어든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 경험을 감당할 용기를 잃어버린 것일까. 아이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아이들을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월호 이후, '책임'은 왜 개인의 몫이 되었나
수학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우리는 한 장면을 떠올린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다. 그 상실은 너무 컸고,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방식이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한 시스템을 세우기보다, 책임을 더 잘게 나누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방향이 선택되었다. 그 결과,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책임은 점점 개인에게 가까워졌다.
학부모의 요구 역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혹시라도"라는 말은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라, 아무도 완전히 믿을 수 없게 된 사회의 감각이다. 이곳에서 안전은 공공의 약속이라기보다, 각자가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조건이 되었다.
서류 더미에 묻힌 설렘, '내 아이만 따로'라는 요구들
수학여행은 떠나기 전에 이미 시작되고, 그때 이미 여행의 본질은 흐려진다. 계획서와 컨설팅, 안전요원 채용과 범죄경력조회, 초과근무계획과 여행자보험 지출 품의까지. 서류는 촘촘해지고 절차는 빈틈없어 보이지만, 그 정교함 속에서 서글픈 의구심이 따라온다. 이 모든 준비가 정말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사고 시 책임을 면하기 위한 장치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동의서를 보내자마자 걸려오는 전화들 속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우리 아이는 잠자리가 예민해서요. 따로 숙소를 쓰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에는 당혹감이 앞서지만, 이내 그 무리한 요구 아래 깔린 불안의 파동을 읽어내게 된다. 이것은 국가도 학교도 믿을 수 없는 시대에 부모가 선택한 '각자의 안전관리'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설명을 늘어놓지만, 그것은 설득이 아니라 조율에 가깝다.
"협의회를 거쳐 안내드리겠습니다."
이 말은 이제 책임을 나누는 약속이 아니라, 책임을 미루는 방어막이 된다. 그렇게 수학여행은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가능한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축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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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생성 이미지 |
| ⓒ 오마이뉴스 |
"피곤해요. 그냥 여기 있을래요."
그때 휴대전화가 울린다.
"우리 아이가 많이 피곤해하니, 그냥 쉬게 해주세요."
나는 잠시 멈춘다. 아이를 설득하여 함께 산을 올라야 한다는 생각과 혹시 모를 상황이 겹친다.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아이의 성장보다 이후의 장면이다. 책임의 경로, 법정의 공방, 그리고 홀로 비바람을 맞아야 할 누군가의 모습. 이 사회에서 안전사고는 과정이 아니라 결과로 판단되고, 그 결과는 결국 한 사람에게 귀속된다.
"네, 어머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짧은 대답 뒤에서 무너지는 것은 교사의 권한이 아니라, 역할이다. 나는 아이를 남겨두고 산을 오른다. 정상에서 찍은 단체 사진 속 빈자리 하나가 풍경보다 오래 가슴에 남는다. 그것은 한 아이의 결석이 아니라, 우리가 포기한 교육의 자리다.
잠들지 못하는 복도의 위험사회
숙소의 복도는 길고 조용하다. 아이들이 잠든 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그 복도를 몇 번이나 오간다. 문 하나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고의 위험들을 떠올린다. 낮에는 아이들을 따라 걷고, 밤에는 위험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안전요원이 배치되어도 책임은 나눠지지 않는다. 모든 무게는 결국 현장을 지키는 개인에게 수렴된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는 바로 이런 모습일지 모른다. 위험은 제거되지 않은 채 그 책임을 감당할 주체만 개인으로 좁혀지는 사회. 그 무게를 홀로 견뎌야 할 때, 수학여행은 배움의 시간이 아니라 '버텨내는 시간'이 된다.
매뉴얼이 대신한 배움의 밀도
언젠가부터 학교에서는 조용히 사라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계획되지 않았기에 더 값졌던 시행착오, 친구와의 어색한 화해, 함께 길을 잃으며 나누던 농담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경직된 매뉴얼과 체크리스트다. 확인, 점검, 보고. 모든 것이 기록되지만, 그 사이에서 아이들의 진정한 성장은 끝내 기록되지 못한다. 서류는 늘어나지만 아이들의 서사는 지워지고, 절차는 정교해지지만 경험은 얇아진다. 안전을 확보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배움을 스스로 희석시키고 말았다.
성장은 언제나 편안함의 경계 바깥에서 시작된다. 아동 발달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강조한 교육심리학자 비고츠키의 '근접 발달 영역'은 약간의 불안과 도전이 공존하는 지점에서 가장 크게 작동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선택은 명확하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활동을 지우는 것. 그 결과는 자명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상처 받지 않도록 과보호받는 대신, 상처를 견디고 회복하는 힘은 길러지지 않는다.
교육은 다시 움직여야 한다
수학여행은 꼭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은 이제 다르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안전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교육은 본래 살아 움직이는 과정이다. 낯선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타인과 부딪히며, 스스로를 조정하는 경험이다. 그것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교사 개인이 아니라 제도가 책임지는 구조, 서류가 아니라 실질적인 준비와 안전 훈련이 중심이 되는 시스템, 그리고 완전무결한 안전은 없으며 위험은 함께 관리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그 조건이 마련될 때, 교사는 다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가자."
그 말이 가능해지는 순간, 수학여행은 다시 여행이 된다. 그제야 교실 밖은 사라지지 않고, 아이들의 삶 속으로 다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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