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세 정부에서 모두 중용…이홍구 전 국무총리 별세

허진, 오소영 2026. 5. 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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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2022년 9월 5일 서울 서대문구 서울포럼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전민규 기자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5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34년 경기도 개성시 남산동(현재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남산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3년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학자의 풍모가 강한 고인이지만 학창 시절에는 배구 선수로도 활약했다. 동년배에 비해 장신(179㎝)인 고인은 신입생 시절 서울대 배구부에 들어갔고 그 해 가을 서울 대표로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했다.

하지만 서울대 캠퍼스 생활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입학 이듬해 자퇴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먼저 유학 중이던 사촌 누님의 “목사님 도움으로 에모리대에 장학생으로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시작한 도전이었다. 에모리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복 이후 신생 정부가 탄생하기까지의 정치적 혼란을 청소년기에 목도하고, 6·25 전쟁통에 고교 시절을 보낸 고인이 이제 막 민주주의의 첫발을 내딛은 고국에 도움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선진 정치를 배우는 데 몰두해 얻은 성과였다.

68년 귀국해 이듬해부터 서울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고인은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내는 등 20년 동안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다.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던 고인은 8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럽정치학연구소에서 민주화에 대한 많은 토론의 시간을 가진 뒤 “냉전 종식의 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고 느껴 86년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과 외교 현안 등에 대안을 제시하는 ‘서울국제포럼’을 만들었다. 고인의 조교였던 백영철 건국대 명예교수는 “고인은 한국 최고의 정치학자였다”고 회고했다.

1988년 3월 14일 청와대에서 이홍구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모습. 중앙포토


학자의 길을 걷던 그의 인생이 대전환을 맞은 건 1988년이다. 새로 출범한 노태우 정부에서 그는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맡으며 공직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대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고인은 후학에게 길을 터주려 사직서를 냈다.

당선인 시절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고인을 불러 “내가 뭘 어떻게 했으면 좋은지 강의해달라”고 했고 30분간 고인은 “시대적 과제는 일차적으로 민주화의 진전”이라고 전제한 뒤 영국 연방(Commonwealth·코먼웰스)의 개념을 남북 관계에 적용한 ‘코리안 코먼웰스’ 개념을 강의했다. 열흘 뒤 고인을 다시 부른 당선인은 “국민이 원하는 것은 민주화와 통일”이라며 “나는 민주화의 과제를 성실히 수행할 것이고, 통일에 대해선 이 교수가 지난번에 말한 그대로 내각에 들어와 추진하길 바란다”고 입각을 제의했다.

그렇게 고인이 주도해 최초의 여야 합의로 만들어진 통일 정책이 1989년 발표된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이다. 자주·평화·민주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 체제를 거쳐 통일된 민주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게 핵심 골자다. 고인은 당시 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각각 이끌던 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여야 제 정당의 합의로 통일 원칙을 확립한 13대 국회에 대해 “가장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국회였다”고 훗날 평가했다.

1994년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과 환담을 진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대통령 정치특별보좌관 ▶주영국 대사를 지낸 그는 김영삼 정부에선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이 됐다. 당시 고인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 직전까지 이끌었다. 북한 김용순 대남담당 비서와 1994년 6월 28일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만나 7월 25일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한 것이다. 고인은 만년에 이하경 중앙일보 대기자에게 자신과 김용순이 판문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성사 직전 김일성의 급서로 정상회담이 무산된 것이 너무 아쉽다. 막혀있는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고인은 1994년 12월엔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총리가 되기 전부터 2002년 월드컵유치위원장을 맡은 고인은 총리와 위원장직을 겸직하며 전 세계에 월드컵 유치의 당위성을 설파해 사상 첫 월드컵 개최에 기여했다. 1996년 5월 유치전 막판 한·일 공동 개최로 가닥이 잡힐 때 고인은 명예위원장으로서 일본 측과 공동 유치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총리로서 김영삼 정부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화를 앞장서 추진한 고인은 1년여 뒤 자리를 내려놨다.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고인은 “업적보다는 책임을 많이 느낀다”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6월 29일)를 언급했다. 총리 공관에서 바누아투공화국 총리와 공식 만찬을 하다가 양해를 구하고 현장으로 달려간 고인은 엄청난 사고임을 직감했고 사고 수습에 진력했다.

1995년 6월 29일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이홍구 당시 총리가 병상에 있는 생존자를 만나 위로하고 있다. 중앙포토


공직을 거친 그는 1996년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합류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해 치러진 15대 총선에선 전국구(현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책임 총리를 통한 권력 분산, 후원회 없는 정치 등 이른바 ‘새 정치 모델’과 통일 대통령을 내세운 고인은 신한국당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지만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다. 3개월 동안 고군분투하다 중도 포기한 고인은 “정책에 시비를 걸어올 주자를 기다렸지만 단 한 사람, 단 한 건도 잘잘못을 따져온 주자는 없었다”며 정쟁에만 매달리는 현실을 개탄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은 그의 어깨를 또 다시 무겁게 했다. 이른바 ‘IMF 사태’로 불린 외환위기 속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 입장에서 한·미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미국 조야에 두루 인맥이 있고 총리까지 역임한 고인을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주미국 대사 적임자로 여겼다. 청와대는 고인에게 여러 차례 대사직을 제의했지만 신한국당 대표와 대선 경선 주자를 지낸 고인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DJ가 직접 전화해 “경제 위기의 조기 해결과 국제 신인도의 제고를 위한 여건을 조성할 수 있도록 주미 대사를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그는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고인은 “(신한국당을 배신했다는 비난으로 인한) 개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외환위기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살리겠다고 결심했다”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미국 주요 인사들을 만나 한국을 도와달라고 설득했다”고 회상했다. 고인은 그렇게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뤄낸 새 정부의 대미 관계를 안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2021년 10월 28일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이홍구 전 총리 미수(米壽) 기념 심포지엄’에서 고인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2000년 대사직을 마치고 귀국한 고인은 중앙일보 고문을 맡아 학계와 정계, 외교가를 누비며 얻은 실천적 경험의 지식을 언론계에 전파했다. 특히 ‘이홍구 칼럼’을 중앙일보에 연재하며 정치 현안과 남북관계 등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민주화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모두 중용되며 “적이 없는 통합의 정치인”으로 평가받은 고인은 국가 원로로서의 역할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가 함께하는 대화문화아카데미의 대화 모임에서 중심 역할을 오랫동안 했다. 고인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적절히 나누는 분권은 국가의 전체 권력을 오히려 늘리는 방향”이라며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분권형 개헌의 필요성을 틈날 때마다 설파하기도 했다.

언론인 후배들에게도 고인은 따뜻한 스승이었다. 사회 현안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기사를 쓴 기자에겐 손수 전화를 걸어 “정말 훌륭한 기사였다. 기자는 그런 기사를 많이 써야 한다. 언제든 궁금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내 방으로 오라”고 했다. 주니어 기자에겐 더 없는 칭찬이자 격려였다.

유족으론 배우자 박한옥 여사, 딸 소영·민영(동덕여대 교수)씨, 아들 현우(EIG 아시아 대표)씨, 사위 이강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 며느리 황지영(홍콩한인여성회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에 마련됐고, 조문은 5일 오후 3시 이후 가능하다. 영결식은 8일 오전 8시에 치러지고, 장지는 천안공원묘지다.

허진·오소영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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