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재판시효까지 숨으면 그만”…판결 직전 증발하는 사기범들
사기 사건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 형 선고 전에 잠적해버리는 경우가 늘고 있다. 사기범죄처럼 법정형이 10년이 넘는 사건은 피고인 출석 없이 형을 선고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노리고 일부러 선고 직전에 몸을 숨겨 형사소송법상 재판시효(의제 공소시효)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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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영장 12회 발부에도 못잡아…면소 처분 받기도
4일 법조계에 따르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상 배임 혐의로 기소된 A씨는 2010년 11월 12일 네번째 공판까지만 출석한 뒤 사라졌다. A씨는 코스닥 상장사의 모회사 대표로 재직하던 2008년에 186억원 상당의 계열사 주식을 사들이면서 중도금과 잔금 165억5000만원을 회사에 납입하지 않은 채 소유권을 넘겨받은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법원은 2015년 3월부터 지난달까지 A씨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매년 총 12회에 걸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러나 번번이 영장 집행은 실패했고 영구미제 사건으로 전환됐다.
서초구에서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던 B씨 역시 부동산 개발을 미끼로 피해자로부터 약 7년간 44억410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B씨는 2015년 첫 공판기일에 불출석한 뒤 나타나지 않았다.
재판을 피해 달아난 후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건강식품판매회사 대표였던 C씨는 2007년 투자자들에게 천년초 판매사업으로 돈을 불려준다고 속여 13억6176만원을 가로챘다. C씨는 2010년 재판 선고기일에 불출석한 뒤 14년간 도망다닌 끝에 검거됐으나 2025년 2월 법원은 재판시효 만료로 면소 판단했다. 재판시효는 2007년 15년에서 25년으로 늘었지만 그 이전 발생한 범죄는 개정 전 법 적용을 받기 때문이다.
지명수배로 재판시효 완성 전에 간신히 선고를 하는 사례도 있지만 드문 편이다. 5억원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된 D씨는 2012년 9월 법정에서 선고 날짜를 고지받자 모습을 감췄다. D씨는 12년만인 2024년 10월 덜미를 잡혀 구속돼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불출석 재판’ 대상 제외된 사기죄…“장기미제화 우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사건 가운데 장기미제사건 3건 중 1건 꼴로 피고인 불출석(92건 중 34건)이 원인이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불출석할 경우 법원은 소재지를 파악해 공시송달하거나 신병확보를 시도하지만 판사들은 “작정하고 도망친 피고인을 잡아오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수사기관도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불출석 피고인들을 잡는데 적극적이지 않은 분위기라 피해자들이 직접 피고인을 쫓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한다. 수도권의 한 부장판사는 “피해자들은 재판에 꼬박꼬박 나와 피해 울분을 터트리는데 피고인 방어권만 과도하게 지켜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사기, 준사기 등 법정형이 10년 이하에서 20년 이하로 상향돼 피고인 출석 없이 재판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영구미제화 되는 사건이 폭증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소촉법)에 따라 법정형이 징역 10년을 넘으면 피고인이 반드시 출석해야한다. 2023년 11월 보이스피싱 법정형을 1년 이상으로 상향하고 불출석 재판을 못하게 되자 지난 3월 기준 2년만에 피고인 불출석으로 인한 미제건수는 52배 증가했다.
불출석 재판 대상에서 사기죄, 보이스피싱 등 예외로 두는 소촉법 개정안이 지난 29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사기죄, 보이스피싱 등의 경우 재판에 한번 출석 후 두 번째에 불출석시 재판 진행이 가능하게끔 하거나 선고기일에 불출석할 경우 출석 없이 판결을 선고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보름·최서인·조수빈 기자 kim.boreum1@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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