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화의 과학 산책] 헤파 필터와 마음 필터

봄이 오면 숨쉬기가 조심스러워진다. 황사와 미세먼지, 꽃가루가 뒤섞여 마스크와 공기청정기가 일상이 된다. 그 중심에는 ‘헤파 필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섬유들이 무작위로 얽혀 있는 구조. 얼핏 정돈되지 않은 혼란처럼 보이지만, 그 복잡함 덕분에 작은 먼지까지 붙잡아 낸다. 헤파 필터는 정갈함이 아니라 뒤엉킴으로 작동한다. 섬유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면 공기는 쉽게 통과하겠지만, 미세한 먼지도 그대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크다.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얽힘이 가장 강력한 방어막이 되는 셈이다.

나는 이 구조를 보며 ‘마음 필터’를 떠올린다. 우리는 삶을 단순하고 정리된 상태로 유지하려 한다. 생각도, 경험도, 관계도 깔끔하게 정돈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정렬된 마음은 외부의 충격에 취약하다. 예상 밖의 말 한마디, 낯선 상황, 실패의 경험이 곧장 깊숙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양한 경험과 생각이 뒤섞인 마음은 다르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낯섦과 익숙함, 공감과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수록 새로운 자극은 쉽게 중심에 닿지 못한다. 이미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촘촘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복잡함이 완충 장치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려고 애써 온 것은 아닐까. 같은 길만 걷고, 비슷한 생각만 반복하고,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만 머무르려는 습관 말이다. 헤파 필터가 무작위의 얽힘으로 공기를 지켜내듯, 우리의 마음도 다양한 경험과 관점이 서로 얽힐 때 더 단단해진다. 낯선 책 한 권, 새로운 취미, 예상치 못한 만남, 때로는 실패와 좌절까지. 이 모든 것이 마음속 섬유가 되어 우리를 보호한다. 지금 내 마음에는 얼마나 다양한 섬유가 얽혀 있을까. 마음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삶을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선화 국가연구소대학원(UST)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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