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앞둔 시댁 조카의 엄포,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김윤희 기자]
결혼 4년 만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가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독서모임 후 엄마들과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학교에서 여자 아이들이 두각을 나타낸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아들 둘을 둔 엄마가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외동딸 키우는 엄마들이 제일 싫어요."
그녀의 주장은 이랬다. 외동딸 엄마는 딸 하나 키우면서 유난스럽다는 것이다.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키워진 외동딸들은 이기적인데, 그런 외동딸들이 아들들을 문제아처럼 보이게 하고 성적까지 우수하니 화가 난다고 했다.
그로부터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의 무례함은 잊히지 않는다. 이 일이 불현듯 떠오른 건 박정훈 기자의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2026년 2월 출간)을 읽으면서였다. 아들에게 여성 혐오의 씨앗을 심는 이가 어쩌면 엄마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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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6년 출간된 박정훈 기자의 신작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 이 책을 통해 남성을 이해하고, 여성의 자리를 확인했으며, 비로소 연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김윤희 |
그의 시선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 속 여성들을 호명할 때 빛났다. 2024년 탄핵 집회에서 용기있게 발언한 노래방 도우미 여성, 그리고 5·18 당시 주먹밥을 나르고 시신을 수습했던 황금동 유흥업소 여성들이다(164p) 저자는 40여 년의 시차를 둔 두 장면을 한 페이지에 그려내며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불러냈다.
책 후반에는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미영 '급식 대가'를 언급하며 열악한 학교 급식 노동자들의 현실을 조명했는데, 역시 미처 알지 못했던 여성 노동의 실상을 마주하게 했다. 급식 노동자들은 아이들의 성장과 건강을 책임지고 100인분 이상 조리하는 능력자들임에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87%의 노동자에게 '폐암 의심' 소견이 나타날 정도로 고강도, 고위험의 노동임에도 기본급은 206만 원에 불과하다(246~247p). 급식 노동을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있지 않은지 우려하는 글을 보며 지인이 떠올랐다. 그는 중학교 딸아이를 홀로 키우는 고등학교 급식 조리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교 급식실 실상은 책에 나온 초등학교 환경보다 훨씬 가혹하다. 초등학생과 달리 성인만큼 먹는 고등학생의 배식량은 상상을 초월하고, 진짜 전쟁은 배식 후에 시작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식판을 일일이 손으로 닦아 기계에 넣어야 하는 애벌 설거지까지, 이 노동의 밀도가 조리사들을 골병들게 하고 있다. 자주 입술이 부르트고 손목 아대를 하고 다니는 지인을 떠올리며 환기 시설 개선과 노동 가치에 걸맞은 임금 보장이 되기를 간절히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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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플릭스 <소년의 시간> 스틸 이미지. |
| ⓒ 넷플릭스 |
저자는 10대의 여성 혐오와 극우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고 말한다.
"여성을 차별하고 성적 대상화 하는 기성세대의 남성문화가 온라인에 맞게 변형되어 이어진 거에 가깝다. 남자 어른들이 만들어왔던 남성 지배사회의 여성 혐오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 25p
드라마에서처럼 "여자한테 처맞았네. 등신 새끼"와 같은 혐오의 말을 내뱉는 남자 아이가 환호받는 장면을 보면, 남성 어른들은 그것을 '남자답다'라고 자랑스러워할까.
책의 모든 내용에 고개가 끄덕여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미혼 20, 30대 남성이 결혼을 선망하고 결혼을 통해 남편, 아빠가 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안적 남성성을 찾지 못했다'(58p)라는 부분에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서 비혼이 이미 기본값이 된 만큼, 남성들도 달라졌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이런 내 생각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시댁과 친정을 포함 30대 남자 조카 네 명에게 책의 내용을 톡으로 보내고 어떤지 물었다. 결과는놀라웠다. 이미 결혼한 조카는 가부장적 아버지상을 내면화하는 것 같다고 답했고, 미혼인 세 조카 역시 결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전통적 가장'의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고백했다. 남성성의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한쪽 발은 과거에 묶여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혼인 조카를 빼고 세 명 모두 여자 친구가 있는데 저자가 우려한 '전통적 리스크'가 그들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 결혼을 앞둔 시댁 조카가 있다. 그는 자신의 엄마에게 결혼 후 아내에게 설거지나 요리를 시키면 엄마를 보러 오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비록 그 이야기를 전하는 형님(시누이)은 배신감에 분노를 터뜨렸지만, 나는 그 엄포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불효가 아니라, 가부장의 그늘을 스스로 걷어내고 파트너와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선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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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 사이를 잇는 그물코로 형성된다. AI생성 이미지 |
| ⓒ 오마이뉴스 |
이 책을 읽는 내내 연대자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 해답은 '엄마'라는 나의 역할에 있었다. 증오 대신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들을 수 있는 '관계 형성'은 여성이, 그것도 엄마들의 강력한 무기다. 증오는 타인과 긴밀한 관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제한적인 견해를 맹신함으로써 생긴다.
만약 '외동딸 키우는 엄마들이 제일 싫다'던 그 엄마가 4년 동안 아이를 갖기 위해 우리 부부가 어떤 시간을 견뎠는지 알았다면, 제이미 아버지가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걷어내고 아들의 감정을 읽기 위해 닫힌 방문에 노크를 더 자주 했다면 어땠을까. 그 증오는 힘을 잃었을 것이다.
이 책을 딸뿐만 아니라, 아들 키우는 동네 엄마들에게 권하고 싶다. 그리고 아들의 알고리즘에 관심을 가지라고 오지랖을 부릴 것이다. 엄마들의 연대가 어두운 방구석 커뮤니티의 환호를 먹고 자라는 아들들의 증오에 빛을 들여 금이 가게 할 것이라 믿는다. 나 또한 이제, 언제 어디선가 여성 혐오 발언을 들었을 때 10년 전처럼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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