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대군이 하는 '섭정'... 실제로는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김종성 기자]
<21세기 대군부인>에서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권을 행사하는 이안대군(변우석 분)은 임금의 어머니인 윤 대비(공승연 분)와 사사건건 감정 대립을 겪는다. 대비는 임금의 숙부인 이안대군이 또 다른 수양대군이 되어 자기 아들을 단종처럼 만들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래서 '왕과 사는 남자'인 이안대군은 윤 대비와의 관계가 불편하다.
4월 11일 방영된 이 드라마 제2회에서는 이안대군이 휴가 중일 때 임금 이윤(김은호 분)이 산업 공로자들에게 어사화를 수여하게 된 일이 묘사된다. 윤 대비는 어린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기회입니다"라며 "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오세요"라고 한 뒤 "이안 그자가 없어도 말입니다"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숙부 없이 행사장에 입장한 왕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고, 드라마에서 의례 그러는 것처럼 숙부가 갑자기 등장해 안심시킨다.
섭정과 대비의 갈등은 지난달 25일 방영된 제6회의 궁중 무도회 장면에서도 묘사된다. 황족 복장을 갖춘 이안대군과 현대식 드레스를 입은 대비는 서로 몸을 밀착하고 춤을 추는 동안에도 날 선 대화와 날카로운 눈빛을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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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대군부인>의 한 장면. 이안대군(변우석 분)은 임금의 어머니인 윤 대비(공승연 분)와 갈등을 겪는다. |
| ⓒ MBC |
철종이 즉위한 1849년 7월 28일(음력 6.9)부터 그가 후계자 없이 죽은 1864년 1월 16일(음 12.8)까지 조정을 장악한 세력은 왕실 외척인 안동 김씨다. 철종이 1863년 12월 8일에 죽었다고 잘못 적힌 책들도 많지만, 이는 1863년의 음력 12월 8일을 양력으로 변환하지 않은 결과다. 철종이 임금 자리에 있었던 1864년 1월 16일까지의 15년간을 왕실처럼 군림한 가문은 안동 김씨였다.
대원군은 왕실 사돈에 의한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군주권을 강화하는 방향을 추구했다. 안동 김씨 세도에 맞서다가 스물한 살 나이로 요절한 효명세자(1809~1830, 순조의 아들)의 부인인 조 대비 역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거부했다. 이 점에서, 대원군과 조 대비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뜻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대원군은 세도정치 자체를 근절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조 대비는 달랐다. 조 대비의 친정인 풍양 조씨는 순조의 재위기간 일부이자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인 1827~1830년, 헌종 재위기의 일부인 1840~1849년에 안동 김씨를 제치고 세도를 누린 일이 있다. 조 대비 입장에서는 그 같은 가문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서로의 입장이 다소 달랐던 대원군과 조 대비가 어린 고종을 둘러쌌다. 그래서 고종 즉위 후에는 섭정과 대비가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과 조 대비는 안동 김씨와의 관계에서는 동지였지만, 두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경쟁자 비슷했다.
그러나 대원군과 조 대비의 입장 차이가 <21세기 대군부인>에서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곤란했다. 그렇게 되면, 당장 손해를 입는 쪽은 대원군이었다. 조 대비 쪽에도 손실이 생기지만, 당장 아쉬운 쪽은 이하응이었다.
대원군은 고종의 친부라는 이유로 국정 운영에 참여했지만, 그의 섭정 지위가 친부라는 지위에서 자동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어린 아들이 임금이 되면 아버지가 당연히 섭정이 된다는 법률도 관행도 없었다. 법적 측면에서, 그의 섭정 지위는 친부 자격과 무관했다.
1852년 9월 8일(음력 7.25) 출생한 고종은 1864년 1월 21일(음력 12.13) 즉위할 당시 12세였다. 세자 수업도 받지 못한 열두 살짜리가 왕이 됐으므로 한동안은 대리인이 국정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 권한을 맡은 쪽은 조 대비다. 이런 경우에는 왕실 여성이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이 시대의 상식이었다.
철종 사망 당일의 상황을 다룬 철종 15년 12월 8일 자 <고종실록>은 대신들이 조 대비에게 흥선군의 아들이 즉위하면 수렴청정을 하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조 대비는 내가 어떻게 그것을 하겠느냐며 일단 겸양을 표시한 뒤 준비절차 진행을 지시했다. 이렇게 조 대비의 수렴청정이 준비되는 가운데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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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촬영한 흥선대원군. |
| ⓒ 위키미디어 공용 |
1885년에 개화파 인사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흥선대원군 약전(略傳)>은 고종 등극 직후에 풍양 조씨가 권세를 잡았다면서 이 집안에 마땅한 인물이 없어 "조후(趙后)가 뜻대로 다스렸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조 대비가 자기 뜻대로 국정을 주도했고, 대원군은 의견을 보태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이 책은 알려준다.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안동 김씨의 위세가 여전히 막강했다는 점,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단독으로 상대하기는 다소 버거웠다는 점, 19세기의 잦은 민란으로 인해 세상이 어수선했다는 점, 서양세력의 진출로 인해 동아시아가 혼란스러웠다는 점 등과 더불어, 이하응이 일반 왕족과 달리 출중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 대비가 이하응 같은 걸출한 왕족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국정을 이끌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조 대비가 내린 결단은 자신의 수렴청정 권한을 근거로 대원군에게 국정 운영을 위임하는 것이었다. 고종의 양모가 수렴청정권을 근거로 고종의 친부에게 섭정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흥선대원군약전>은 이로 인해 대원군이 전권을 장악한 시점이 1865년이라고 알려준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한 경복궁 중건이 추진되면서 대원군이 실질적 최고지도자가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최고지도자가 된 뒤에도 공식적 권한은 여전히 조 대비에게 있었다. 수렴청정권자인 조 대비가 위임을 철회하면 대원군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조 대비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 <21세기 대군부인>의 이안대군처럼 대비의 심기가 나빠지건 말건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조 대비를 의식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흔적을 지우며 왕권강화를 추진했다.
조 대비의 수렴청정은 1866년 3월 29일(음 2.13)에 끝났다. 만 14세의 고종이 업무를 직접 처리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이 무렵에 형성됐던 것이다. 대원군의 권한은 조 대비의 위임하에 존재했으므로 대원군의 섭정도 공식적으로는 이때 끝났다.
하지만 대원군은 이를 무시했다. 이때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면, 그해에 발생한 병인양요(프랑스 침공)와 제너럴셔먼호 사건(미국 상선 침공)은 물론이고 1871년의 신미양요(미국 침공)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프랑스의 시장개방 요구를 거부하고 그들에게 군사적으로 맞선 이 사건들은 대원군 특유의 기질에도 크게 기인했다.
대원군은 1866년 3월 29일 이후로도 권력을 놓지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고종이 친정(親政)을 하게 됐지만, 대원군이 사실상의 섭정을 하는 상태가 그 후로도 이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이 암중모색 끝에 이뤄낸 것이 1873년 12월 23일(음력 11.4)의 아버지 축출이다. 스물한 살이 된 고종은 자신이 실질적 의미의 친정을 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아버지를 실각시켰다.
<21세기 대군부인> 속의 대비는 "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오세요", "이안 그자가 없어도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 몰래 자파 세력을 곳곳에 심어놓은 고종은 그날 자신 있게 "홀로 해낼 수 있다", "흥선, 그분이 없이도 말입니다"라고 천명함으로써 아버지가 꼼짝없이 물러나게 만들었다. 9년간 '왕과 사는 남자'였던 대원군의 섭정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종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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