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두 장만 남기고 떠난 천사, 그 섬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희용 2026. 5. 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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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0] 소록도의 두 천사 할매 마리안느·마거릿

[이희용 기자]

▲ 젊은 시절의 두 할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에 다닐 때 찍은 마리안느 슈퇴거(오른쪽)와 마가렛 피사렛 간호사.
ⓒ 사단법인 마리안느와마가렛
5월 17일은 한센인의 날이다. 1916년 국립소록도병원이 문을 연 날에 맞춰 2004년 한국한센총연합회가 지정했다. 법정기념일은 아니지만 보건복지부가 유공자들을 표창하고 전국 한센인의 화합을 다지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펼친다. 올해는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10주년이자 제23회 한센인의 날이다.

1873년 노르웨이 의학자 게하르트 한센은 나환자의 세포에서 나균(癩菌)을 발견함으로써 나병이 유전병이라는 기존의 통설을 뒤집었다. 피부가 문드러진다고 해서 붙은 '문둥병'이란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딴 한센병으로 바뀌었다.

일제는 1909년 12월부터 전국 주요 지역에 자혜의원(慈惠醫院)을 설치하며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19번째 자혜의원을 열었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나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병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반 병원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사회 불안 요소를 줄이고 일본의 앞선 의술을 과시하겠다는 의도로 나환자들을 집단 격리 수용해 치료했으나 인권을 침해하고 낙인과 차별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소록도 자혜의원 본관 소록도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자혜의원 본관. 1917년 건립됐으며 2003년 5월 27일 전라남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해방 후에도 감금, 폭행, 살인, 강제 노역, 자녀 격리, 불임수술 등이 자행돼 자해나 자살, 탈출 시도 등이 끊이지 않았다. 소록도의 비극은 이규태 조선일보 기자가 1966년 <사상계>에 기고한 르포 '소록도의 반란'에 영감을 받아 이청준 작가가 1974~1975년 <신동아>에 연재했다가 1976년 단행본으로 펴낸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그리스도왕시녀회 소속으로 정결·청빈·순명 종신서원

소록도는 나환자들에게 악명 높은 수용소였으나 이곳을 '한센인들의 천국'으로 만들려고 애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 슈퇴거와 마가렛 피사렛이다. 각각 고지선과 백수선이란 한국식 이름이 있지만 환자와 주민에게는 큰할매와 작은할매로 불렸다. 가톨릭 재속회(在俗會)인 그리스도왕시녀회 소속 평신도로 정결·청빈·순명을 종신서원하고 봉사를 실천했다.

마리안느는 1934년 4월 24일 오스트리아 티롤주 농촌 마을 마트라이에서 2남 5녀 가운데 맏딸이자 셋째로 태어났다. 살림은 넉넉지 않았으나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다. 1947년 5월 성당 주일미사에 참석했다가 필리핀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신부의 강론을 듣고 먼 나라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기로 결심했다.

마가렛은 1935년 6월 9일 폴란드 비엘스코 비아와에서 태어났다. 2남 2녀 중 셋째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고 아버지는 큰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다. 집에는 가사도우미와 하인이 북적거려 유복하게 자랐으나 1939년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가족을 따라 오스트리아 마트라이를 거쳐 외가인 인스브루크로 이주했다. 마가렛은 14살 때 신비 체험을 한 뒤 그리스도왕시녀회에 가입했다.

둘이 만난 것은 1950년 마가렛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였다. 마가렛은 간호사가 갑자기 떠나는 바람에 임시 직원 자격으로 일손을 거들었고, 마리안느는 여성직업학교를 다니며 간호 보조업무를 했다. 1952년 나란히 인스브루크 대학병원 간호학교에 입학해 3년간 같은 방에서 지냈다. 이때 마리안느도 마가렛 영향을 받아 1954년 그리스도왕시녀회 회원이 됐다. 간호사 자격증을 딴 뒤 마리안느는 인스브루크 대학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일했다. 마가렛은 비엔나 아동병원에서 근무했다.

1959년 마가렛 한국 입국, 1962년 마리안느 소록도 입도
▲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걸어온 길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 전시실에 두 간호사의 걸어온 길을 사진과 연보로 정리해놓았다.
ⓒ 고흥군
먼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마가렛이었다. 그리스도왕시녀회 지도신부의 권유를 받고 유럽의 유일한 한센인 정착촌인 프랑스 오트레슈에서 봉사하며 경험을 쌓은 뒤 1959년 12월 19일 한국에 도착했다.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 근처에 있던 한센인 마을 베타니아원과 전북 전주의 동혜원에서 봉사하다가 1961년 9월 서울 혜화동에 있던 가르멜 수녀원(1963년 수유동으로 이전)에 들어갔다.

마리안느도 마가렛과 함께 한국행을 지원했으나 지도신부는 해외 봉사를 견디기에 너무 허약하다고 판단해 허락하지 않았다. 3년 뒤 국립소록도병원 조창원 원장의 부탁을 받은 해럴드 광주대교구장이 오스트리아 대주교에게 간호사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자 그리스도왕시녀회 간호사들을 파송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마리안느도 허락을 받았다.

1962년 2월 24일, 마리안느는 고흥반도 남서쪽 끝 녹동항에서 통통배를 타고 소록도에 들어왔다. 당시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인은 6000명이었다. 처음 맡은 일은 영아원에서 한센인 아기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면역 체계가 채 갖춰지지 않은 아기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부모와 함께 지내면 감염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따로 키웠다. 그에게는 아이를 돌보는 일 말고도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고국의 지인들에게 의약품, 옷, 장난감 등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가장 큰 후원자는 오스트리아부인회였다.
▲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쓰던 물건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가 환자들을 돌보는 데 쓰던 의료 기구와 간병 도구. 2025년 국가유산청 예비 문화유산으로 선정됐다.
ⓒ 국가유산청
가르멜 수녀원은 일절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한 달에 한 차례 30분간 면회를 빼고는 외부인 접촉도 금지되는 봉쇄 수도원이었다. 마가렛은 건강이 나빠져 3년 만에 중도하차했다. 수녀원을 나오자 금세 건강을 회복했다. 수녀 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소록도에서 마리안느와 함께 10일간 지낸 뒤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마리안느도 1965년 7월 국립소록도병원 조직이 개편되면서 귀국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만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간호사 생활을 하며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벨기에의 한센인 구호단체 다미안재단 지원으로 인도 마드라스주 볼룸바캄에서 6개월간 한센병 치료 현장을 체험하기도 했다. 다미안은 19세기 미국 하와이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선종한 벨기에 출신 신부다.

환자 피고름 짜내며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유
▲ 한센인 돌보는 두 간호사 마가렛(왼쪽)과 마리안느 간호사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고 있다.
ⓒ 사단법인 마리안느와마가렛
다미안재단이 1966년 4월 15일 한국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와 구라(救癩) 사업 협정을 맺고 소록도병원 환자들의 재활 수술 지원에 나서자,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그해 10월 16일 다시 소록도에 들어왔다. 그때부터는 다미안재단에서 파견한 의사들의 수술과 진료를 돕는 간호 업무를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한센병은 유전되지 않고 전염성도 약할 뿐 아니라 완치될 수 있는데도 세간의 통념은 그렇지 않았다. 피부 병변을 유발하는 증상 탓에 의료인과 가족조차 환자들을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한센인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으며 세상을 저주하기 일쑤였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달랐다. 사랑스러운 눈빛과 친근한 대화로 상처받은 마음까지 치유하고자 했다. 피고름을 직접 짜내는가 하면 맨손으로 약을 환부에 발랐다. 어쩌다 피고름이 튀어 옷이나 몸에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한센인들은 이들을 천사라고 여겼다. 이들의 따뜻한 마음과 헌신적 태도는 국내 의료진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협정 기간 5년이 끝나자 다미안재단은 1971년 4월 철수하며 의료기구와 장비 등을 소록도병원에 기증했다. 정부는 다미안재단 대표이자 성형외과 전문의인 반 드로겐브뢱 박사에게 국민훈장 동백장, 간호사들에게는 보건사회부 장관 표창장을 수여했다. 소록도 중앙공원에는 다미안 공적비가 세워졌다. 한 달 뒤에는 마리안느·마가렛과 동료 간호사 마리아 디트리히의 공덕을 기린 비석도 건립됐다. 3명 이름이 모두 '마'자로 시작해 이곳 사람들은 '세마비'라고 부른다. 마리아는 1972년 여름 귀국했으나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남았다. 소록도 한센인들과 평생 함께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한센인들은 완치가 되더라도 나환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녀 생활이 어려웠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부인회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전남 장성군 진흥면에 땅 4000평(약 1만 3000㎡)을 구입한 뒤 8가구에 나눠줬다. 그 뒤로도 오스트리아부인회는 한센인 가정에 여러 차례 정착 지원금을 전달했다. 오스트리아부인회는 1973년 문을 연 소록도병원 정신병동을 비롯해 녹산초등학교 건물, 시각장애자병동, 목욕탕 등의 건축 기금도 보내왔다.

둘은 국립소록도병원 소속 간호사였으나 월급을 받지 않은 채 그리스도왕시녀회가 매달 보내는 생활비에 의존했다. 그나마 식비 말고는 자신들을 위해 쓰는 돈이 거의 없었다. 화장품도 쓰지 않았고 옷도 늘 입던 옷만 입거나 구호품 상자에서 맞는 것을 골라 입었다. 날짜가 지난 달력 종이도 잘라서 메모지로 썼다. 남는 돈은 환자들의 간식비나 퇴원자들의 차비로 건넸다.

수상 기록 화려하지만 사양한 상이 더 많아
▲ 노년의 두 할매 큰할매 마리안느(왼쪽)와 작은할매가 에델바이스 꽃을 들고 있다.
ⓒ 사단법인 마리안느와마거릿
이 같은 선행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미담을 알리려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과 상을 주겠다는 제의가 잇따랐다. 하지만 이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기자들이 오면 숨었고 수상도 거절하기 바빴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국민포장, 대통령 표창,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 호암상, 보건사회부와 대한간호협회 감사패 등을 받았으나 사양한 상이 더 많았다.

1972년 7월 24일 국민포장을 받을 때도 청와대에 가지 않겠다고 버텨 소록도에서 휘장과 부상을 전달받았다.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는 몇 차례 초청해도 서울에 올라오지 않자 소록도에 찾아와 서훈했다. 호암상도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상금을 좋은 일에 쓸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설득을 받아들여 수상한 뒤 새 구급차를 구입했다. 회갑 때도 병원에서 잔치를 열어주려는 기미를 눈치채고 "기도하러 간다"라며 2주 동안 섬을 떠나 있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떠나는 날까지 깊은 감명을 주었다. 애초 소록도에 묻힐 생각이었으나 칠순을 넘기며 체력이 달려 환자를 돌보기 힘들어지자 짐이 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가진 것을 하나씩 주위 사람에게 나눠주며 신변을 정리한 뒤 편지 두 장만 남긴 채 2005년 11월 21일 소록도를 떠났다. 가져간 짐은 입국할 때 들고 온 낡은 가방이 전부였다. 이들이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소록도는 울음바다가 됐다.

모국 생활은 곤궁했다. 국가에서 주는 연금은 최저 수준이었고, 수녀원에 머물 수도 없으니 친척 집을 전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가 지급하겠다는 퇴직금은 사양했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소록도병원 성당에서도 "한국에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내실 수 있도록 돕겠다"라고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2016년 소록도병원이 개원 100주년을 맞아 초청했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제2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나올 수 있도록 꼭 와 달라"라며 거듭 간청하자 마지못해 마리안느가 11년 만에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치매를 앓던 마가렛은 장시간 비행을 견뎌내기 어려워 동행하지 못했다.

이때도 마리안느는 "우리가 한 일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 언론에 나가면 한 일보다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라면서 기자간담회나 언론 인터뷰 등을 극구 사양했다. 그해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이 주어졌다. 2002년 월드컵 축구 국가대표 감독 거스 히딩크에 이어 두 번째였다. 명예고흥군민증, 만해대상, 간호대상, 나이팅게일 기장상, 국제간호대상, 대한간호협회 명예회원증 등도 잇따라 주어졌다.

해외 봉사 떠나는 한국의 마리안느·마가렛 후예들
▲ 음악극 ‘섬: 1933~2019’ 소록도 한센인과 두 간호사의 이야기를 담은 음악극 ‘섬: 1933~2019’의 한 장면. 국립정동극장에서 2019년 초연됐고 2024년 재연됐다. 올해도 9월 22일~11월 22일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 국립정동극장
이들의 감동적인 삶은 영화, TV 다큐멘터리, 음악극 등으로 꾸며졌고 살던 집은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됐다. 2016년 소록도병원에 문을 연 한센병박물관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쓰던 물건과 한국을 떠날 때 남긴 편지 등을 전시해놓았다.

2019년 3월 소록도가 마주 보이는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에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관 및 기념공원과 나눔연수원이 들어섰다. 마리안느·마가렛선양사업추진위원회도 발족해 2021년부터 고흥군과 함께 마리안느·마가렛 봉사대상을 시상하고 있다.

마가렛은 2023년 9월 29일 오스트리아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오스트리아의과대에 기증했다. 지난달 말 만 92세를 넘긴 마리안느는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다. 몸은 떠났어도 마음은 소록도 한센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국내에는 이들을 본받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도우러 저개발국으로 떠나는 봉사자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 100년의 이야기> <대한민국의 파트너,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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