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역사의 베일을 벗기다, 해방 후 청주 좌파운동의 실체
'청주 기억여행'은 해방 후부터 1960년 4·19 혁명까지 청주의 현대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었던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이 문서는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1946년 8월~10월에 생산한 문서입니다. 충북 도내의 정치, 경제, 문화단체의 개요와 현황을 조사한 것입니다. <기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중앙공원에서 독립운동가 환영대회가 성황리에 끝난 것을 목격한 홍봉희는 김의연, 안철수 등과 함께 자치위원회를 조직했다. 서울에서 여운형·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건국준비위원회와 보조를 맞추는 일이었다. 충북자치위원회는 15인이 참여했지만, 활동다운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간판을 내려야만 했다.
해방 후 청주 지역 정가를 우파가 장악했기 때문이다. 지역의 유력자 및 실업가들이 청주읍사무소 2층(현재 청주시의회 청사)에 모여 충청북도 치안유지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은 구연직 제일교회 목사가 맡았다. 이들은 남아 있는 경찰들과 협력하여 관내 치안 유지를 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친일경찰이 청산되지 못한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치안유지회는 자치위원회를 흡수·통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장은 이명구가 맡았다. 그런데 위원장을 맡은 이명구는 일제강점기에 청주 지역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중추원 참의,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2010).
즉, 역사적으로 청산되어야 할 반민족행위자가 건국준비위원회 충북지부 위원장이 되는 희대의 코미디가 연출된 것이다.
청주 지식인과 자치운동의 형성
홍봉희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건국의 주춧돌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절망감을 느꼈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의 진주를 앞두고 인민위원회로의 개편을 단행했다. 인민위원회는 단일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좌·우를 망라한 민중들의 자치 조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우익이 보이콧을 하면서 좌익들만의 정치조직이 되었다.
충청북도에서는 10개 시군 중에 7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그중에서 영동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했는데, 일제시대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의 역사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45년 11월 20일,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의 대표자대회가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열렸다. 충청북도를 대표해서 조준하, 노서호, 장준, 김종우가 참석했고, 청주시를 대표해서 신형석, 홍봉희, 소철영, 이상목 등이 참석했다.
청주시 대표자 중 1인인 홍봉희는 어떤 인물인가? 홍봉희는 석교동 출신으로 일제시기 청주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했고, <조선일보> 청주지국을 운영했다. 해방 후에는 중앙공원 앞에서 '충북석유(설립자 김원근)'라는 석유판매업을 하던 이였다. 그는 불교도이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책 48권을 소지하였다. 당시 청주에서 최고의 사회과학 서적 소장자였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1946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정치·경제·문화단체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인민위원회 충북지부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조준하 / 부위원장 : 노서호
서기장 : 신형석 / 내정부장 : 김상수 / 노농부장 : 김영식 / 문교부장 : 박인섭
재정부장 : 이상목 / 선전부장 : 노재형 / 보안부장 : 김학영 / 산업부장 : 홍봉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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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인민위원회 충북 인민위원회 현황 |
| ⓒ 국사편찬위원회 |
신형석(충북민전 총무부), 김상수(진주 출신으로 영운동에서 풍로공장 운영.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점령기에 청주시 인민위원장 역임), 김영식(충북민전 총무부), 박인섭(청원군 강외면 쌍청리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이상목(모충동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노재형(청원군 부강 출신. 충북민전 조직부, 민청 청주시책)은 충북인민위원회 주요 간부이자 이후 민청, 민주주의민족전선, 남로당의 주요 간부를 맡게 된다.
회원은 30명으로 되어 있는데, 간부 숫자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8월~10에는 인민위원회가 전국적으로 미군정의 탄압을 받던 시기라 그 활동이 비합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청주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충북인민위원회 회원 수를 정확하게 조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위 자료에서 명기된 간부 중 김학영(보안부장)만이 이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충북인민위원회 간부는 절대다수가 지식인 출신이라는 점이다.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인민위원회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명단 중 이력이 확인된 이들은 모두 지식인이다.
위원장 : 미정 / 부위원장 : 노서호
서기장 : 소철영 / 내정부장 박성목 : 노농부장 : 신형식(후일 충북국민보도연맹 간사장 역임), 문교부장 : 임상순 / 재무부장 : 최충모(청주농고·연희전문대 졸업. 후일 근로인민당 활동)
선전부장 : 김◯한 / 보안부장 : 박명준 / 산업부장 : 이근복
좌파 운동과 민주주의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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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도 청주부 민주주의청년동맹 현황 |
| ⓒ 국사편찬위원회 |
위원장 : 김용달 / 부위원장 : 김당우, 신연우
총무부장 : 류기원 / 조직부장 : 이지영 / 선전부장 : 김태호
사업부장 : 손금성 / 문예부장 : 김기환 / 미술부장 : 장능범
음악부장 : 형◯곤 / 여자부장 : 양금남 / 출판부장 : 박노상
체육부장 : 이장호 / 정보부: 김하흠 / 후생부장 : 백일선
청주민청 간부 중 기존 활동이 알려진 이는 전무하다. 이들의 활동 내역을 밝히는 것은 추후의 과제이다. 1946년 하반기에 민청이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면서 좌익 청년들은 1947년 7월경 민주애국청년동맹(아래 민애청)으로 조직 명칭을 변경했다.
'민청 소년부의 충청북도 지부 맹원 1,600여 명은 같은 해 10월 한 달 동안 남로당으로 편입되기도 했다'라는 기록은 충북민청의 조직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다(김행선, <해방정국 청년운동사>, 2004).
'조선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해방을 기함. 조선여성은 단결을 공고히 하여 완전한 독립 국가 건설의 일익이 되기를 기함. 조선여성의 의의 계몽과 질적 향상을 기함'을 강령으로 삼은 부녀동맹 청주지부의 간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조창숙 / 부위원장 : 박희순
총무부장 : 정정옥 / 재정부장 : 한옥균 / 조직부장 : 남현구
문화교양부장 : 이화매 / 선전부장 : 양금남 / 후생부장 : 서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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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녀동맹 부녀동맹 청주지부 현황 |
| ⓒ 국사편찬위원회 |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하다
해방 후 좌파는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당시 전 국민의 염원이었던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 노동법 제정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인민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정치적 상층부라면 노동조합(전평), 농민회(전농), 청년(민청·민애청), 여성(부총·여성동맹) 등의 단체는 대중단체였다.
청주에서도 노동조합이 민들어졌다. 해방 후 청주의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대마공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굴된 자료에는 대마공장을 포함한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이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강고히 단결하여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함.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를 지지함. 우리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일체 생활의 급진적 향상을 기함'을 목적으로 청주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간부로는 위원장 음진식, 서기부 정진홍, 조직부 송판석, 선전부 김하진, 연락부 허숙, 쟁의부 이지영이 있었다.
중앙공원 서쪽에 있었던 <동지사>는 '민중계몽을 목적으로 신문 발행을 취지로 함'을 목적으로 하는 언론사였다. 대표자로는 노재형, 박성복, 김상수 등이 있었다. 이들 모두가 좌익 운동의 핵심 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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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민당 청원지부 조직도 인민당 청원지부 조직 현황 |
| ⓒ 국사편찬위원회 |
위원장 : 노서호 / 부위원장 : 이시우, 홍봉희
총무국장 : 안철수 / 총무차장 : 최동식 / 당무부장 : 임상순 / 정무부장 : 신현창
재무부장 : 김영식 / 경제부장 : 이근복 / 문화부장 : 김주봉 / 선전부장 : 최종모
조직부장 : 이상목 / 노동부장 : 남정흡 / 청년부장 : 류기원 / 부녀부장 : 조창숙
해방 후 초대 청주농업학교 교장이었던 안택수의 동생 안철수는 충북민전 대의원을 하게 되고, 최동식 총무차장은 청남학교 교사로 후일 충북민전 대의원을 하게 된다. 문화동 출신의 김주봉, 전국부녀총동맹 중앙위원 조창숙은 충북민전 선전부원이자 자금책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청주세무서장이었다고 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40~50년대 청주 지역 정치사회상, 2009; 최동찬 증언; 김동수 증언).
교사의 파면,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이어지다
1946년 2월 15일과 16일에 걸쳐 한반도 이남 지역의 좌파 계열 정당 및 단체가 집결하여 민전을 결성했다. 의장단은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 백남운이 맡았다. 충북민전 초대 위원장은 부강 출신의 노서호가 맡았다.
그는 민전 중앙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후 영동군 양강면 출신의 장준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 충남북대표와 1944년 건국동맹 충남·북지부 책임자를 역임했다. 그는 충북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이자 민중운동의 지도자였다. 충북민전의 간부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원장 : 노서호 / 부위원장 :김상수, 송인섭
토지대책(부장) : 김학준 외 11명 / 경제대책 : 김학준 외 11명
문화대책 : 안철수 외 10명 / 사회대책 : 오정현 외 8명
친일파민족반역자 대책 대표 : 정태성 외 9명
청원 부용면 출신의 김학준은 지주 집안의 자제로 동경대를 나온 인텔리였다. 전 청주중학교 교사 오정현은 1946년 2월 초 학교로부터 파면을 당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 발언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의 파면은 청주중학교와 청주 시내 중학교 동맹휴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연고로 오정현은 충북민전 사회대책 위원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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